처음 만났던 냄새, 공기, 소리
초등학교 시절(아니, 국민학교 시절), 아빠는 해외 출장을 정말 많이 다니셨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이고, 러시아, 유럽, 남미까지 다녀오셨다. 당시 내겐 비행기로 몇 시간이 걸리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아르헨티나, 멕시코 같은 곳까지도 출장지가 되었다.
내 초등학교 시절이라 하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였다. 그 시절엔 주변에서 해외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비행기가 어디까지 직항으로 가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빠의 출장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한국에 계실 때도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들어오셨으니, 다른 점이라면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실 때 항상 선물을 가득 들고 오셨다는 것뿐이었다. 우리 선물도 많았지만, 엄마를 위한 가방을 출장마다 하나둘씩 사오셨다. 브라운 컬러에, 대부분이 셀린느라는 브랜드의 가방이었다. 당시에 한국에는 없는 외국 브랜드였다. 크로스백부터 숄더백까지 다양한 사이즈로 엄마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가방을 사오시는 게 아빠의 특별 미션같았다.
어느 날은 홍콩 출장(혹은 트랜스퍼)에서 돌아오시며 홍콩 면세점에서 평소와 다른 가방을 사 오셨다. 브라운이 아닌 블랙 컬러였고 셀린느가 아닌 다른 브랜드였다. 브라운을 좋아했던 엄마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아빠에게 교환해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해외에서 산 물건도 교환이 된다는 사실에 놀랐고, 아빠의 다음 홍콩 출장 스케줄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도 궁금했다. 마치 학교 수업 시간표처럼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중학생이 되어 특수고 준비반에 합격해 외고반에 다녔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동네 언니들과 그룹 과외를 받았다. 해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오신 선생님 댁에서, 나와 언니 두 명이 함께 영어를 배웠다. 대부분은 영어 만화영화를 보며 단어나 표현, 그리고 노래를 배웠다.
가장 감동이었던 만화 영화는 <알라딘>이었다. 화면 속 그래픽도, 영어로 하는 대사들의 목소리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영어 노래들은 뭔가 더 기묘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 스토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영어라는 언어가 주는 매력에 푹 빠져 영화를 보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렇게 자주 출장을 다니시던 아빠는 결국 홍콩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아예 홍콩에 상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해외로 이사하는 가족이 없었기에, 홍콩으로 이사하는 것이 옵션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생각해보면, 아빠와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셨던 것 같다. 일단 엄마와 동생과 함께 홍콩에 놀러 가보기로 했다. 여권을 처음 만들고, 비행기를 타고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김포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의 기억은 없지만, 홍콩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은 아주 선명하다. 너무 놀랬기 때문이다.
비행기는 홍콩 공항 건물과 바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고, 비행기 문이 열리면 우리는 일단 밖으로 나가야 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평생 맡아보지 않은 냄새와 마셔보지 못한 공기가 훅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공기는 꽤나 익숙했다. 바로 목욕탕의 습식 사우나실 문 열면 마주치는 그 공기였다.
'설마 사우나실에서 사는 거야, 이 사람들?'
다행히도, 공항 건물로 들어가니 에어콘 바람으로 너무나 시원하고 상쾌하기까지 했다. 다만, 야외 관광지인 오션파크같은 놀이 공원이나 건물 사이를 걸어 다닐 때면 어김없이 그 습식 사우나가 떠올랐다.
냄새와 공기 다음으로 놀라웠던 것은 소리였다.
하루는 홍콩음식인 '딤섬'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에 갔다. 아침부터 호텔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레스토랑의 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믿을 수 없을 만큼 시끄러운 소리가 한꺼번에 귀로 훅 들어왔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니, 나에게는 그저 웅성거리는 소음이었다. 학교 쉬는 시간에 들리는 수다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어릴 때 부산 큰 이모 댁에 놀러갔을 때 광안리 시장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중국 사람들이 쓰는 베이징어(만다린)는 성조가 4개인데 비해, 홍콩 사람들이 쓰는 광둥어는 9개라고 한다. 홍콩 사람들도 이 높낮이를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밥먹는데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건, 너무 예의 없는거 아닌가? 분명 호텔 레스토랑이었는데, 사람들 정말 매너없다는 생각을 하며 일단 앉아 음식을 먹어봤다. 그때까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탕수육이었는데, 딤섬을 먹고 또 한 번 놀랐다. 탕수육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맛있는 중국 음식이 많다는 걸 알았고, 그 종류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