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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사람들의 세상

낯설고도 익숙한 공간, 홍콩

by 정물루

국제 무역 도시.

지금 살고 있는 두바이도 이제야 비로소 국제 무역 도시라 부를 만하지만, 원조는 홍콩이 아닐까 싶다. 아편전쟁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영국령으로 남았던, 시작은 분명 불쾌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독특한 색깔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거대한 중국 옆에서 작지만 분명한 아이덴티티를 가진 곳, 바로 '홍콩스러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라마다 문화적 특색은 있지만, 중국 문화, 영국 문화, 그리고 여러 외부 문화가 뒤섞이며 90년대 홍콩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듯한 아나키즘적인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홍콩 사람이라는 독특하고 이색적인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1997년 중국 반환을 대비해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의 여권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겉모습은 중국인이었지만 마음속 국적은 달랐던 셈이다. 그리고 나처럼 잠시 머무는 외국인들도 수없이 많았다. 아직 개방 전이던 중국과 사업을 위해서, 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비지니스의 헤드쿼터로 홍콩은 최적의 거점이었다.



겉모습은 중국인이고 광둥어도 할 줄 알지만, 스스로를 홍콩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과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친한 친구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엄마는 한국인, 아빠는 싱가포르인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이라면 그 친구가 어느 나라 여권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물어봤겠지만, 그때는 그게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 집에서 어떤 언어를 쓰는지, 밥은 어떤 방식으로 먹는지가 무엇보다 궁금했다. 엄마는 잔소리를 영어로 하는지, 만다린으로 하는지, 아니면 한국어인지? 친구는 한국어를 전혀 못했다.


하루는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내 호기심을 단번에 풀 수 있는 기회였다. 식탁에는 김치를 포함한 한국식 반찬이 있었고, 큰 접시에는 Sweet & Sour Pork(중국식 돼지고기 탕수육), 야채, 생선 등 중국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 반찬과 중국 요리의 콤보였다. 대화는 기본적으로 영어였고, 중간중간 광둥어가 섞였다. 나는 광둥어 몇 마디와 택시 기사님들에게서 배운 욕 정도만 알았으니, 그들의 영어 대화만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친구 어머니는 나를 향해서는 한국어로 조용조용 말씀해주셨다. 내 친구와 언니, 남동생 그리고 아빠는 전혀 못 알아듣는 듯 했다.



홍콩 사람이 아닌, 그러나 홍콩에 사는 또 다른 사람들은 중국 본토 사람들이었다. 영어와 광둥어가 지배적이던 도시 속에, 슬슬 만다린이 들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배웠지만 일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던 언어였다. 홍콩에서 쓰는 한자(번체자)와 중국 본토 한자(간체자)도 달랐고, 성조와 발음도 완전히 달랐다. 같은 한자를 쓰는데 왜 소통이 안 되는지, 혹은 소통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건지 의아했다. 홍콩 사람들이 굳이 자신들을 ‘Chinese’라 하지 않고, ‘Hongkonger’라고 불렀던 이유를 나는 다 알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첨밀밀>은 이런 풍경을 아련하게 담아냈다. 맥도날드에서 일하던 홍콩 직원들이 본토 출신 손님이 'Hanbaobao'라 주문하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장면. 사실 다 알아들으면서도 'Hamburger'라고만 말해야 통하는, 애매한 경계의 순간. 같은 중국인이면서도 영국인보다도 다른, 심리적, 문화적 거리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어린 나는 그 장면에서, 그동안 설명되지 않던 홍콩의 묘한 바이브를 이해할 수 있었다.

Image.jpeg 영화 <첨밀밀>의 한 장면 (출처: 핀터레스트)


자의든 타의든, 디아스포라들이 모여 살던 도시 홍콩. 정체성을 '고향'이라 부르기도 애매했던 이곳은 그야말로 많은 게 믹스되고 또 매치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싱가포르인 남편과 살고 있다. 90년대 말 친구네 집 식탁 풍경이, 고스란히 지금 내 집 식탁에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홍콩이 아닌, 두바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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