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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복

한국 드라마 속 기억

by 정물루

UAE 넷플릭스 순위에는 늘 한국 드라마가 있다. 지난 3-4년 내내 Top5 안에서 빠짐없이. 나조차도 따라가기 벅찰 만큼, 드라마의 인기도, 업데이트 속도도 놀랍다.


한국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친한 네델란드 친구가 종종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준다. 그렇게 보게된 작품들이 꽤 있다. 드라마 덕분에 그 친구 부부는 내년 봄 한국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먹었던 한국 음식은, 말해 뭐해. 그 자체가 이미 최고의 홍보였다.


우리 아이들은 '오징어 게임'을 사랑한다. 시즌 업데이트 날짜와 시간을 친구들과 공유하고, 그 시간에 맞춰 함께 빈지와칭을 한다. 3년 전쯤엔 한국에서 달고나 만들기 세트를 주문해 동네 아이들과 달고나를 수도 없이 만들어 먹었다. 드라마 속 한국 게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수도없이 반복했고.



한국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내 일상에 강하게 파고든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90년대 홍콩에 살 때에도 한국 드라마를 공수해보곤 했었다. 넷플릭스나 유투브같은 온라인 영상 플랫폼이 없던 시절, 한국 슈퍼마켓에서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정해진 기간동안 보고 반납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번거로운 방식이었다. 습기 가득하고 후덥지근한 홍콩 날씨를 뚫고 왔다 갔다 해야했으니.


그때에는 번거롭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 설렘이었고, 번거로움은 오히려 두근거림으로 채워졌다. 테이프를 몇 번이고 돌려보며 온갖 말랑말랑한 기분을 느꼈던 그 시간은, 마치 종합 선물 세트를 받은 것처럼 겹겹의 감정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언제나 내 현실과 이어져 있었다. 당시 내가 푹 빠져 있던 드라마는 <마지막 승부>였다. 대학 농구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장동건과 손지창을 중심으로 한 라이벌 구도, 그리고 청순한 심은하와의 사랑과 우정이 펼쳐졌다. 잘생기고 에너지 넘치는 배우들뿐 아니라, 드라마 속 한국 대학 생활의 일상, 그리고 OST까지 모든게 완벽했고, 내 삶의 영감으로 다가왔다.


Image 5.jpeg <마지막 승부> 영상 스크린샷 (출처: Kakao TV)


그러니까 대학은 무조건 한국으로 가야했다. 연세대 농구부의 남자친구를 사귀겠다는 은밀한 계획도 함께.


굳은 계획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물론, 연세대 농구부 남친 이야기는 빼고.


그 이후로는 한국 대학에 가기 위한 준비를 최선을 다해서 했다. 해외 거주자 입시 전형에 맞춰 자격 요건을 알아보고 과외, 문제집, 참고서를 구해 열심히 노렸했다. <마지막 승부> OST를 들으며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결국 한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연세대 농구부 남친도 사귀었다. 이 정도면 나는 '드라마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드라마 덕분에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고, 그 목표를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쓰면서 생각해보니, <마지막 승부>가 아닌 (그 시대에는 없었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 같은 드라마를 봤더라면 지금쯤 의사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감히 대중예술을 하위 문화라고 했던가? 그 영향력은 믿음처럼, 때로는 종교보다도 깊게 현실로 스며든다. 비디오를 빌리러 가고 반납해야했던 번거로움조차 번거롭지 않게 만들고, 그 모든 여정 속 감각과 기분들이 내 몸 안에 선명히 각인되어 남아있다. 그렇기에 바란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나보다 더 괜찮은 '드라마 복'이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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