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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신과 닮은 이들과 가깝게 지내는 일

홍콩 영어

by 정물루

"What do you want?"


학교 캔틴 안에 작은 스낵 샵이 있었는데, 거기 아줌마가 내가 무엇을 살까 두리번거리는 걸 보더니 저렇게 말을 걸었다. 달달한 게 먹고 싶기도 하고, 짭짤한 과자가 당기기도 해서 망설이는 순간이었는데, 불쑥 저 말이 들리니 마음이 급해졌다. 분명히 영어에도 존댓말은 아니더라도 공손한 표현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사납게 들리는 건지 괜스레 기분이 별로였다.


스니커즈바 하나를 집어 들어 가격을 물으니, “Free!” 하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이게 공짜라는 건가? 영어가 아직 부족했던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아줌마는 다시 한번, “Free! Free Dollars!“라고 했다. Free면 Free지, Free Dollars는 또 뭘까?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엄지, 검지, 중지 손가락을 펴 보이며, “Free Dollars!“라고 했다. 그제야 알아들었다. Three라는 말이었다. 홍콩 사람들은 ‘th’ 발음을 ‘f’로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Thank you는 Fank you가 되고, Think는 Fink였다.


나는 홍콩은 영어를 쓰는 나라니까 당연히 표준 발음을 쓰리라 생각했다. 영국령이고, 영국 사람들도 많고, 간판이나 메뉴 같은 생활 속 대부분이 영어로 되어 있으니 그들이 쓰는 영어가 ‘맞는’ 영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한국에서 배우던 영어는 모두 미국식이었고, 발음부터 단어, 문장까지 미국 사람들이 쓰는 걸 그대로 따라 외우곤 했다. 그런데 홍콩에서는 다른 영어가 있었다.


이렇게 홍콩 영어처럼 로컬화된 영어가 많다는 걸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발음은 그렇다 쳐도, “What do you want?“는 정말 너무 예의 없는 말 같았다. 억양도 그렇다. 광동어 특유의 높낮이 심한 성조가 그대로 옮겨 와 뚝뚝 끊어지고, 때로는 공격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정작 홍콩 사람들끼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기분 나빠한다거나, 매너 없다고 말하지도 않고, 그냥 서로 그렇게 대화하고 이해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제1차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 난징조약 체결로 홍콩에서는 영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다. 홍콩 사람들은 집에서는 광동어를 쓰면서도,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다. 이미 몸에 익숙해 있던 문화 위에 또 다른 문화가 덧입혀지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홍콩 영어는 그래서 특별하다. 광동어도 아니고, 영국식 영어도 아니고, 그 중간 어디쯤에 자리한다. 차갑기도 한듯 아닌듯, 친근하기도 하고,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포멀하지 않은, 묘한 리듬이 있다. 그리고 같은 홍콩식 영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는 그 안에서만 통하는 연대가 형성된다.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에도, 이 언어는 여전히 홍콩만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친한 친구 하나가 홍콩의 투자 은행에 취직을 했다. 우리는 각자 첫 회사에서 회사원 생활을 시작했고, 첫 휴가에 홍콩으로 모였다. 반환 이후의 홍콩이었다. 홍콩에 살던 친구를 포함해 넷이서 빨간 택시를 타고 랑콰이펑 클럽 거리부터 섹오(Shek O) 바닷가까지 신나게 돌아다녔다. 친구 중 한 명은 미국 뉴저지에서 15년을 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미국 영주권자였다. 그녀의 영어는 전형적인 미국식이었다. 하지만 홍콩 택시 기사님과의 영어로의 대화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언어는 그 땅의 숨결과 사람들의 삶이 스며든 결과물이다. 홍콩 영어는 이상한 말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묻어 있는 홍콩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게는 어린 시절 추억이 얽힌, 그 거칠고 단단한 억양이 오히려 로맨틱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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