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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크리스마스

by 정물루

한국에서 영상으로 세미나를 하면, 우리는 왕왕 날씨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두세 달 전만 해도 벌써 너무 더워서 걸어 다닐 수가 없다고, 밤에도 달리기가 불가능하다고들 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서울 아래 지역을 걸어서 전국 횡단을 한다는데, 날씨가 너무 뜨거워서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더위를 호소하곤 했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나자, 이제는 겉옷 없이는 밖에 나가기 힘들다고 한다. 겉옷을 꼭 챙겨야 한다는 말과 함께, 겨울이 오기 전에 독감 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계절 이야기를 덧붙인다. 한국 사람들은 계절 변화를 인사 겸, 아이스브레이크용 대화로 자주 꺼낸다.



내가 살고 있는 두바이나, 남편의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어릴 적 지냈던 홍콩에서는 이런 대화가 잘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진 ‘여름 나라’들이지만, 중학생 때 홍콩으로 이사했을 때는 계절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낯설었다. 사우나 같은 습도는 기본이고, 일 년 내내 덥거나 따뜻했다.


“기온이 1도까지 떨어져 노숙자가 얼어 죽었다. 이상 기온이다!”


1도가 얼어 죽을 날씨인가. 영하 1도도 아니고 영상 1도인데? 그렇다면 한국의 노숙자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알고 보니 홍콩의 평균 기온은 23도 안팎이었다. 한여름에는 35도까지 오르고, 대체로 10도에서 35도 사이를 오르내린다.


아열대 기후의 홍콩에도 쌀쌀한 날은 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따뜻한 편이라 공원 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거나 밖에서 잠들어도 얼어 죽을 일은 없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 모든 나라가 한국처럼 사계절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이렇게 쭉 단어들만 썼을 뿐인데도 참 로맨틱하다,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


물론 학교에서 배워서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열대 지역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막연히 홍콩은 서울 같은 도시이니, 사계절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머릿속에서는 일 년 내내 여름 같은 나라들은 도시가 아닌, 시골이나 농장 풍경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홍콩에서 새 학교로 전학가며 교복을 구입해야하는데 겨울용 점퍼와 가디건도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겨울'이라니? Winter? 홍콩에도 겨울이 있다는 건가. 겨울이면 눈도 온다는 건가?


두바이에 십 년 넘게 살아보니 이제야 알겠다. 겨울이라는 건 꼭 한국에서처럼 눈이 내리고 길이 얼어붙는 추위일 필요가 없다는 걸. 홍콩의 겨울은 평균 15–20도, 드물게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러니 영상 1도에 노숙자가 얼어 죽었다는 건 확실히 이상 기온이 맞았다.


한국의 겨울 패션은 무겁고 챙겨입어야할 옷과 악세사리가 많다. 하지만 지금 여름 나라(홍콩보다도 더 익스트림한 두바이)에서는 일년 내내 입는 옷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겨울에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로맨틱하다. 발까지 부츠로 챙겨 입어야 하고 털장갑에 귀마개까지 챙겨 입는 한국의 겨울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러고 보니 홍콩과 두바이의 겨울은 꽤 닮았다. 기온도 비슷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입는 겨울옷 스타일도 비슷하다. 모자티나 점퍼를 챙겨 입지만 신발은 항상 슬리퍼. 가장 추운 12-15도에 발시려울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10도가 넘는 날씨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커녕, 춥지도 않은 날씨에 몸을 녹일만한 따뜻한 차나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었으니. 그런데 지금은 10도만 돼도 너무 춥다.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춥다고 벌벌 떨고 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기분도 나고 연말 분위기도 맘껏 즐긴다. 그리고 사막에라도 나가면 더 추워져서 모닥불 없이는 버티기 힘들다며 준비를 철저히한다. 모두 슬리퍼를 신은 채로.


IMG_3830.jpeg 2022년 두바이 겨울 어느 날, 사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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