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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 그리고 K-드라마

by 정물루

두바이에는 이케아가 두 군데 있다. 13년 전에 왔을 때도 있었던 원조 이케아에 오랜만에 갔다. 이케아에 가면 피할 수 없는, 쓸데없는 것들을 사는 일이 시작된다. 짜여진 동선을 따라 슬슬 걸어가면서 그날의 목표였던 독서등을 찾아가는 길에, 이것저것 필요할 것만 같은 물건들을 한두 개씩 집어 카트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NATTBAD, 낫베드라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봤다. 스웨덴어로 된 이케아의 제품명들은 영어로 읽어보면 늘 웃기다. 이 제품도 Not Bad. 그래서 내 휴대폰에 연결해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애플뮤직의 내 플레이리스트를 열어 요즘 Gym이나 달리기를 하면서 내 에너지를 확 올려주는 노래인 Golden을 틀었다. 한국에서는 '케데헌'이라고 부르는, Kpop Demon Hunters의 대표곡이다. 지나가던 어른들은 슬쩍씩 쳐다봤고 아이들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스피커 쪽으로 달려오거나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지나가거나 살짝씩 헌트릭스 춤 동작을 흉내 내기도 했다.


이 넷플릭스 시리즈는 미국 소니 픽쳐스 애니메이션에서 만들긴 했지만, 한국계 2세, Korean American들이 주축이 되어 작업했다. 한국의 문화와 언어, 음식, 장소들 그리고 민화에서 영감을 받은 캐릭터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한국어가 섞인 대사와 가사들까지, 한국적인 맥락 안에서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런데 왜, 어떻게 이런 콘텐츠가 외국인들에게 끌리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트렌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90년대 홍콩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의 음악과 영화는 아무래도 미국 중심이었다. MTV 어워드와 음악 차트에는 당연히 대부분 모두 미국이나 영국 밴드, 가수들 이름이 올렸다. Spice Girls, Michael Jackson 같은 팝 음악부터 Green Day, Oasis 같은 락밴드까지, 친구들은 이런 음악을 흥얼거리고 기타도 배우고 춤도 따라 추곤 했다. 용돈을 모아 CD도 사고 포스터도 사서 방에 걸어두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분기마다 댄스파티를 열어 이런 팝 음악을 함께 듣고 안무도 맞춰 추기도 했다. 학교 실내 체육관을 어둡게 만들고 조명도 달면 평소 농구하고 수업하던 곳이 클럽으로 바뀌는 날이었다. 교복이 아닌 춤출 때 예쁘게 보일 수 있는 옷과 화장을 하고 가서, 발라드에 맞춰 커플 댄스도 추기도 하고 수다도 실컷 떨었다. 또 다른 학교에서 열리는 댄스파티에도 초대받아 가보기도 하면서, 음악은 늘 우리 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유행했던 건, 일본 JPOP이었다. 나는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 정도와 엑스재팬 노래 몇 곡만 알았는데, 내 베스트는 일본 음악과 가수들 이야기를 늘 해줬다. 결국 이 친구는 대학에 일문학을 전공했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말로 다 못한다. (지금은 케이팝 러버가 되었지만은)




영화는 홍콩 영화가 대세였다. 당시 홍콩이 영화 산업의 중심이었으니까. ‘사대천왕’이라 불리던 유덕화, 장학우, 여명, 곽부성이 주인공이 된 홍콩식 누아르 영화가 극장을 휩쓸었다. 그리고 왕가위 감독은 화려한 도시 속에서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색채, 조명, 카메라 워크를 통해 예술적이고 디스토피아적으로 보여줬다.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그리고 2000년대의 화양연화까지, 현대인의 고독을 아름답고 묘하게 담아냈다.


왕가위 감독은 클래식, 재즈, 팝음악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홍콩을 배경으로, 내가 살고 있던 그 도시를 더 로맨틱하고 신비롭고 애틋하게 만들어 주었다. 해피투게더(1997)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그의 영향력은 아시아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금도 중경삼림에서 왕페이가 부르던 ‘몽중인’을 들으면 기분이 묘하게 말랑말랑해진다.*


영화 '중경삼림' 중



그런 홍콩에서 90년대 한국은 특별히 호감도, 적대감도 없는 나라였다. 그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 지금도 종종 묻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는 ‘코리안’이라고 하면 먼저 North Korean인지, South Korean인지 물어봤다. 학생 신분이라서인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듣는 말은 “한국 사람들은 똑똑하다며? 수학 잘한다며?” 정도였다. (왜 한국 사람들이 수학 잘한다는 이미지가 생겼는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30년이 지난 지금, 두바이에 살고 있는 나에게 '코리안'이라는 건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명품 가방을 들고 있는 것처럼. 정확한 숫자는 없지만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I Love K-Drama!"


넷플릭스의 영향도 크겠지만, 케이드라마에 대한 외국인들의 애정은 참 신기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중동, 서아시아 지역의 트렌드일까?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두바이 거주민의 80%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케이드라마의 인기는 아시아만의 현상이 아닌 듯하다.


드라마는 상당히 일상적이고 문화적 색채가 짙다. 그 안에는 세계관과 철학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도 외국인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이트는 우리가 예술에 끌리는 이유를 ‘무의식 속 욕망’에서 찾았다. 자기 인식, 자의식,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욕망이 예술로 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문학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예술이 결코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예술 작품은 그것이 탄생한 사회적, 정치적 환경의 흔적을 남기고 우리가 예술을 해석하고 공감하는 방식 또한 개인의 내면뿐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이라는 나라가 커진 영향력 때문에 세계가 주목하는 걸까? 아니면 이미 세계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한국이 품고 있었던 걸까? 분명한 건, 한국의 이야기가 더 이상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 사람으로서 그 흐름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 같아, Not bad ;)





*중경삼림 OST '몽중인' 한번 들어보세요. 가사, 번역, 병음, 해석까지 있는 영상으로 찾았습니다! https://youtu.be/-kX10mnUpno?si=Kgb1q5zODgbyfMx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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