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은 나의 노래
쇼핑하면 떠오르는 도시가 요즘은 어디일까. 사실, 이제는 딱히 없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으로 쇼핑을 할 수 있기에 이제는 '쇼핑 천국' 같은 개념이 더 이상 필요 없을지도. 90년대에는 분명 쇼핑 천국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단연 홍콩이었다. 홍콩은 일단 면세 지역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홍콩을 점령한 영국은 이곳을 아시아의 국제 무역 도시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 도시를 설계했다. 사람들이 모이고 머물고 다른 곳으로 가기 전 잠시 스톱오버할 수 있는 곳. 항공과 조선 사업을 키우고 면세 제도를 도입해 관광객이 쉽게 쇼핑하고 돈을 쓸 수 있는 도시로 발전시켰다.
홍콩에서는 언제나 세일이 있었다. 면세 가격에 추가 할인까지 더해, 일 년 내내 세일 시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시즌이 지난 제품들은 아울렛이나 세일 전문 매장으로 옮겨져 더 저렴하게 판매되었고, 명절이나 공휴일에는 이벤트 세일까지 이어졌다. 이러니 주변국에서 쇼핑 여행으로 홍콩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구찌, 디올, 프라다, 루이비통 같은 유럽 명품 브랜드들은 다른 나라보다 약 20% 이상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당시 해외 명품 브랜드숍이 많지 않았던 한국에서는, 시차도 크고 거리가 먼 미국이나 유럽보다 홍콩이 훨씬 인기 있는 쇼핑 데스티네이션이었다.
한국 연예인들이 홍콩 쇼핑몰에서 포착됐다는 소문도 왕왕 들렸다. 나는 그 시절 중고등학생이었으니 명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전 영부인 김건희의 반클리프 아펠 가짜 목걸이 사건 뉴스를 보고 문득 그때의 홍콩이 떠올랐다.
물론 그녀의 주장은 금세 거짓으로 드러났다. 해당 모델은 그녀가 구입했다고 주장한 시기보다 훨씬 나중에 출시된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홍콩, 특히 중국 본토와 맞닿은 카우룬 (구룡반도, Kowloon) 쪽에는 가짜 명품을 파는 시장이 꽤 있었다.
몽콕(Mong Kok)의 야시장이나 침사추이(Tsim Sha Tsui) 같은 곳에서는 명품 카피 가방, 지갑, 액세서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진짜 매장 안에도 가짜가 섞여 있다는 루머도 돌았다. 그게 루머였는지 진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홍콩에서 산 롤렉스도 가짜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2010년대 초까지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으니, 완전히 허무맹랑한 말만은 아니었을지도.
내게 쇼핑 천국의 홍콩은, 명품이 아니라 문구점이었다. 특히 일본 문구용품! 그리고 그다음이 바로 '사사(SASA)'였다.
사사는 당시 내게 천국 그 자체였다. 요즘 한국의 올리브영처럼, 스킨케어와 메이크업 제품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거기에 면세 가격이었다. 요즘 두바이의 세포라(Sephora)처럼 가격대가 조금 높은 독점 브랜드들도 다루면서도, 올리브영처럼 접근성이 좋았다. 말하자면 세포라와 올리브영을 반반 섞어놓은 형태랄까. 화장품 쇼핑 천국이엇다. 세상의 모든 화장품 브랜드가 있고 거기에 면세 가격이었다. 한국에서의 대학생활 중 홍콩으로 놀러가서 친구들이 사사에서 화장품 백만원어치씩 쇼핑을 하기도 했으니 그때까지도 한국은 이런 컨셉의 상점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직도 사사가 있는지 찾다보니 사사는 1978년에 생겼다고 한다. 1호점은 코스웨이 베이(Causeway Bay, 홍콩섬의 쇼핑으로 유명한 거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사는 아직도 존재한다. 다만 사람들의 쇼핑 형태가 온라인으로 많이 바뀌고 오프라인 비용 절감, 홍콩, 마카오 관광객 감소 등이 겹치면서 사업 규모가 축소된 것이다.
10대에 들은 음악은 뇌와 감정에 각인되서, 평생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첫사랑, 우정, 인생 처음의 감정과 얽힌 노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되살아난다고. 아마 나에게는 홍콩이 그런 노래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홍콩은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내 정체성의 일부로 남았다. 그래서 지금도 무언가를 살 때, 새로운 곳에 갈 때, 문득 어떤 냄새나 빛을 마주할 때마다 그 시절 홍콩의 거리와 경험이 종종, 또 꾸준히 떠오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