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에서
결국 대학은 한국으로 갔다. 지금은 전공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서 학부로 입학을 해서 2학년 때 전공을 정해야 했다. 나는 제2외국어 학부로 입학을 했고 우리 학교에는 불문과, 독문과 그리고 중문과 이렇게 세 개의 전공 옵션이 있었다.
홍콩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만다린이 필수였다. 그리고 중국의 수교와 함께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기업들과 많은 사람들이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2000년 초반, 중국어는 인기 언어였다. 다만, 지금 여기 두바이에서도 그렇지만, 그때도 중국 사람들의 문화 수준은 그들의 경제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했다. 중국과 중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고 이건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나 2003년에는 홍콩에서 SARS가 터지면서 300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아시아의 공포'라 불리며, 학교에서는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학생들이 많을 중문과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2019년 코로나를 경험한 지금은 SARS정도의 전염병은 가볍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제2외국어 학부'라 대부분의 선배들이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그리고 독문과와 불문과는 어학연수에 다녀온 이후로 다들 더 세련되지고 분위기 있어졌다며 서로 칭찬하곤 했다. 하지만 중문과 선배들은 어학연수를 다녀오면 오히려 더 촌스러워진다며, 다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다. 1학년인 나는 그저 농담처럼 들리지만은 않았지만... ‘역시 사대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라며, 나는 중국 다녀와서 더 세련되겠어’라는 굳은 결심을 하기도 했었다.
대학 1학년 생활은 홍콩에서 보던 한국 드라마 '마지막 승부'나 '느낌'처럼 로맨틱하거나 익사이팅하지 않았다. 학교 안보다는 학교 밖이 더 즐거웠던 나는 학점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태어나서 학교를 다닌 이후 최저 점수를 받았고, 1학년 두 학기를 마치고는 제적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래서 결심했다.
도망가기로!
전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어학연수를 가서 중국어를 마스터하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휴학을 결정하고 크나큰 중국에서 어학연수지를 알아보면서, 중요한 건 두 가지였다 - 한국 사람이 적고, 표준어를 쓰는 지역.
나를 믿지 못하는 나는, 한국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 간다면 공부는 잊고 연애하고 놀러 다닐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최소한이고, 너무 발전하지 않아 놀 수 없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어의 인기가 높았던 만큼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베이징과 톈진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나는 이 두 지역을 제외하고 알아보기 시작했고, 결국 찾은 곳은 - 시안(Xian, 西安)이었다.
시안은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때의 수도였고, 그러니까 신라의 경주 같은 곳이었다. 바다를 끼고 발전이 빠른 중국의 동쪽과 달리, 내륙 서쪽의 시안이 끌렸던 이유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인 진시황이 살았고, 유럽까지 이어졌던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간 건 아니었지만, 대충 들어도 신비롭고 진정한 중국 스럽고, 한국 사람도 없고, 사투리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표준어가 통한다고 해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시안에서 한학기 동안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한국 식당도 없고, 한국 슈퍼도 없었다. 시안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공기가 탁했고, 도시 전체가 오래된 무덤처럼 느껴졌다 - 무엇보다 진시황의 병마용이 그 상징이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신을 지키도록 만든 거대한 무덤, 병마용은 8,000개 이상의 실제 크기의 병사와 500마리 이상의 말을 흙으로 빚은 군대였다. 그리고 이 병사들과 말은 모두 표정과 체형이 달라서 ‘진짜 사람을 묻어서 만들었다’는 루머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시안 도시 전체가 무덤이라며. 산 사람들을 묻어서 그 지역에는 귀신이 많다는 이야기를 시안에 도착해서 기숙사 사람들한테 들었다. 귀신이라... 무섭기도 하고 또 궁금하기도 했다. 처음 해외에서 혼자 살 게 된 곳인, 시안에서, 그렇게 나는 또 다른 이방인의 삶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