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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한국인

1995년, 실패도 사랑하는 법

by 정물루

작은 흠집 하나에도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고, 나는 한 번에 모든 걸 잘 해내야만 했다. 나는 완벽해야만 안심하는 아이였다. 그런 내가 영어라는 제2 외국어를 쓰며 한국이 아닌 홍콩이라는 낯선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느 정도 적응해 가던 즈음, 나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반이 있는 캐나다 학교에서 국제학교로 옮기게 됐다.


학교 규모는 훌쩍 커졌고, 같은 학년의 반 수도 두 배로 늘었다. 전 학교에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엔 훨씬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백인 친구들이 많았다. 게다가 입학시험까지 있었으니, 시험 전까지 내 속은 긴장과 초조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설마 입학시험에서 떨어지진 않겠지...' 서울에서는 외고 준비반, 캐나다 학교에서는 ESL 과정을 한 달 만에 끝낸 전적이 있었기에 겉으론 당당했지만, 속으론 혹시나 하는 걱정이 늘 따라다녔다.


홍콩에서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늘 신기한 경험들과 긴장되는 순간이 나란히 있었다. 실수 없이 한 번에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욕심과 작은 실패들에 대한 실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오갔다. 그때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준 건 ‘다꾸’ - 다이어리 꾸미기였다. 그날 있었던 일, 다음 날과 다음 달에 해야 할 일, 꼭 잘하고 싶은 일들을 주절주절 써 내려가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물론 다이어리를 덮는 순간, 다시 걱정이 밀려오곤 했지만. 그래도 예쁜 스티커를 붙이고, 친구가 준 쪽지를 붙이고, 0.3mm 일본 파일롯트 하이테크 펜으로 또박또박 쓰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 반에는 매 수업마다 장난을 치는 일본 남자아이, 수업 시작 후에야 느릿느릿 들어오는 영국 아이, 수업이 끝나면 꼭 숙제를 슬쩍 묻던 한국-싱가포르 혼혈 아이 등, 실패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부모님이 원래 쿨한 건지, 사실 우리 부모님도 공부에 잔소리는 하지 않았지만은.


어떤 것에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그들을 보며 배웠다. 달리기를 잘 못해도,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도, 글씨가 삐뚤빼뚤해 노트가 엉망이어도, 한두 번 수업을 빼먹고 다운타운에 놀러 가도, 내가 걱정했던 만큼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실패 속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고, 그 틈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알았다 - 이 세상에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기꺼이 해보고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그렇게 완벽에 대한 강박을 조금씩 놓아주던 1995년,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배웠다. 홍콩은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실내 활동을 많이 했고, 많은 건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미 그때에도 한국의 코엑스처럼 식사, 쇼핑, 영화관, 아이스 스케이팅 등 모든 편의 시설을 갖춘 복합 쇼핑몰이 곳곳에 있었다. 홍콩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이런 쇼핑몰이, 한국에서 무너져 버렸다. 삼풍백화점이었다.


외신에 계속 기사가 나고, 쇼핑몰에 같이 맥도널드로 점심을 먹으러 가던 친구는 장난스레 물었다.

"이 쇼핑몰이 무너졌다고 생각해 봐. 넌 가장 먼저 뭘 할 거야?"

당시 홍콩은 소고(Sogo), 미츠코시(Mitsukoshi) 등 일본 백화점도 여럿 운영될 만큼 쇼핑의 천국이었다. 한국에서도 연예인들이 쇼핑하러 올 정도로 쇼핑몰이 발달한 곳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제일 럭셔리한 백화점 중 하나인 삼풍백화점이 그냥 무너져버리다니. 한국은 후진국인가, 나는 후진국에서 온 사람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내가 왜 그렇게 창피한지, 한국에 있을 때는 몰랐던 '한국 사람으로서의 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강하게 느꼈다. 뭐든 완벽하고 싶던 나에게, 나의 조국은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자랑스럽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들었다.



1995년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다. 개인적으로는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해,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함께 느낀 해. 개인의 실패와 국가의 실패가 겹쳐 있던 그 시간, 나는 실패 속에서만 보이는 깨달음을 얻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나를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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