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국경 사이
이번 주부터 두바이는 6주 만에 학교가 다시 오픈하고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어쩌다 보니 친구들의 남편이 거의 외국인이다. 영국, 덴마크, 미국, 그리고 우리 집은 싱가포르까지. 다들 아랍에미리트 로컬 회사나 글로벌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이 시작된 이후 두바이에 재난 경보가 매일 울렸던 한달 내내 모두 이곳에 머물렀다.
한국이 보수적인 건지, 아니면 자국민 보호에 더 적극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대기업 주재원을 포함한 현지에서 채용된 한국인의 가족까지 전부 한국으로 대피를 시킨 상황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한국인인 경우, 거의 한 달 정도 한국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아이들 학교가 다시 시작되면서 돌아오는 분위기다.
남편이 외국인인 경우는 아이들의 국적과 언어 문제가 늘 고민이다. 한국은 원칙적으로 복수국적이 제한되어 있어 일정 시점에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여성의 경우 일정 조건 아래 복수국적 유지가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정확한 제도는 더 확인이 필요하지만, 반가운 변화인 건 맞다. 부모 중 한 명의 국적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 아닐 경우, 그 나라 국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일은 여전히 번거로운 절차가 많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한국은 아직 외국인에게 그렇게 관대한 나라는 아닌 것 같다. 특히 ‘선진국 출신’이 아닐 경우 더 그렇다. 두바이에서 아는 필리핀 바리스타가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 커피 전시에 참가하게 되어 비자를 신청했다. 3개월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한국 영사관에서는 여러 서류를 요구했고 그중 하나가 은행 잔고 증명서였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는 모든 서류를 준비해 제출했다. 그럼에도 비자는 계속 펜딩 상태였다.
전시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결국 백업으로 다른 바리스타의 비자를 준비했다. 네덜란드 사람이었는데, 이 바리스타는 별도의 비자도 필요 없었고 은행 잔고 증명 같은 서류도 요구되지 않았다. 비자를 신청할 때 원래 이런 서류까지 요구했던가 싶었다.
일의 특성상 나는 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한국 여권의 영향력이 커진 이후라서인지 비자를 따로 신청할 일이 많지 않았고, 필요할 때도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됐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10년 전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 비자를 받으려면 사전 신청에 인터뷰까지 거쳐야 했고 비용도 적지 않았다. 출장 목적이라 회사에서 서류를 준비해줬지만, 당시에는 한국 여성에게 사우디 비자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UAE 두바이에 거주 중이었고 직업과 거주증도 있었지만, 여성이라서 거절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며 인터뷰를 보러 갔다. 여기 대부분의 공관이 그렇듯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대기 공간이 있었고, 여자들은 번호표도 따로 받아 비교적 빨리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보던 사우디 직원이 내 여권을 보더니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5년 비자를 쾅!
나, 5년까지는 필요 없는데... 속으로 생각하며 나도 씩 웃고 나왔다.
생각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자들한테도 관대하고 통도 크고 한국말 인사까지 하니 우리나라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출장 준비를 즐겁게 했었다.
들뜬 마음으로 한국에 가는 걸 준비했던 내 필리핀 바리스타 친구는 결국 부산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친구가 나한테 말하진 않았지만 내가 사우디 영사관에서 느꼈던 감정과는 정반대였을 것 같다. 얼마나 한국이 싫었을까. 또 얼마나 필리핀 출신이라는 게 원망스러웠을까.
다른 나라에 입국할 때 여권을 보여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 나라 안에서도,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조차 여권을 보여줘야 하고 그 순간마다 환영은 커녕 총을 마주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팔레스타일 출신의 덴마크 예술가 라리사 산수르(Larissa Sansour)의 쇼트 필름 Happy Days(2006)는 바로 그런 일상을 그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겨누고 있는 총을 보는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다. 두려움도, 분노도, 불안도 없이 그저 담담하다. 화면에는 “as THE PALESTINIAN”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마치 팔레스타인이라는 역할을 맡은 배우처럼,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다.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간, 여성으로서의 일상,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Happy Days’라는 제목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통제가 계속해서 드러난다. 결코 행복하지 않은 날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이다.
아이들의 국적 문제를 고민하다 보니, 요즘 계속되는 전쟁과 세계의 혼란 속에서 결국 나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서류가 여권이라는 사실이, 이게 맞나 싶다. 인터넷과 온라인 세상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모두 연결된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는 여전히 완전히 다른 규칙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