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커리어의 시작
세 번째 회사로는 안정적인 IT 중견기업에 입사했다. 그리고 이곳에 다닌 지 한 달 만에 정신병원을 찾았다.
팀은 동성 또래 비율이 높았다. 처음에는 그래서 좋았다. 연차도 나이도 비슷하니 업무 외적으로도 활발히 소통하고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런데 점차 업무 피드백이 과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엄청 신중하구나’ 정도로 여겼던 피드백은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입사 2주 차쯤 됐을 땐 메시지 하나를 읽는데만 30분이 걸렸다. 논문에 가까운 양만큼이나 날 미치게 하는 건 내용이었다.
[예문]
마케터J의 브런치에는 이런 글들이 있어요.
- 대기업 퇴사 이야기
- 스타트업 이직 이야기
- 주택 청약 당첨 이야기
1. ‘글들이’보다 ‘글이’라고 쓰는 게 어감상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글들이’라고 쓰고 싶다면 그 근거 제시.
2. ‘있습니다‘ 대신 ’있어요‘로 끝냈는데 이 어투를 쓴 이유가 무엇인지? 독자들이 ‘해요’체를 선호할 것이라는 객관적 지표가 있는지?
3. ‘이런 글들이 있어요.’ 문장 다음 한 줄 공백을 넣으면 어떨지?
4. 말머리 부호는 주로 점(•)을 쓰는데 작대기(-)를 쓴 이유가 있는지?
5. 대기업 퇴사 이야기 대신 ‘대기업 퇴사 스토리’, ‘대기업에서 나온 이야기’, ‘대기업에서 퇴사하던 날’은 어떤지?
6. 지난 글 대비 반응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그렇다면 예상 수치와 그 근거 제시, 만약 지난 글보다 반응이 안 좋을 경우 대처 방안 제시.
7. 글에 본인만의 톤앤매너가 녹아있음. 팀의 톤앤매너에 완벽히 맞춰지기까지 사전 검수받고 발행할 것.
8. 원활한 피드백을 위해 최소 4주 전에는 기획안을 팀 내 공유할 것
소위 말해 너무 짜쳤다. 이런 식의 피드백이 한시간마다 한 번씩은 왔다. 처음에는 짜친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거만한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수용했다. 꼬박 하루를 피드백만 반영해 주다 퇴근한 날도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월급 받고 이 정도 일만 해도 되는 거면 사실 이득인가 싶기도 했다.
결국 내 스타일대로 치고 나가기로 마음먹고 그들의 피드백을 최소한으로만 반영하자, 그날부터 은근한 기싸움이 시작됐다. 그들이 상태 메시지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두기 시작한 것이다.
- 재밌는 ‘글이’ 많다^^
와 같이 본인이 준 피드백을 강조하는 식으로. 이건 눈치채면 지는 싸움이었다. ‘저한테 하는 말이에요?‘ 하는 순간 불씨가 번져 나만 홀랑 타버리고 마는 그런 싸움.
문제는 이걸 해결할 방법을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팀장님한테 ‘팀원들 피드백이 과해요’라고 한들 정당한 피드백도 듣기 고까워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고, ‘말이 피드백이지 꼬투리 잡아 사람 못 살게 굴어요’라고 한들 입사 한 달 차인 나와 몇 년간 함께 일한 그들 중 팔이 어디로 굽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고민하던 점심시간이 끝나고 그들이 돌아오면 다시 지옥의 피드백이 시작되었다.
사내 메신저는 누가 메시지를 입력 중일 때 저 문구가 뜬다.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닌데 어느 날부턴가 그 문구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콘텐츠 반응 수가 ‘8회’ 떨어졌으니 이탈 요인을 분석하고 대처 방안을 작성하여 보고하라.
8회라는 수치는 명백하게 증감으로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보고를 요구한 팀원은 나보다 연차가 낮은 직원이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수준의 콘텐츠에 미친듯이 달리는 피드백, 반응 한 자릿 수 증감에 요란하게 잡아대는 대책회의에, 저연차 직원의 보고 요구까지... 머리가 띵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과 한 공간에 있을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뒷골이 땅기는 증상이 지속되었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맘때쯤 키보드를 주먹으로 친다거나, 같잖은 피드백 좀 작작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었다. 결국 퇴근 길에 찾은 정신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은 약물 치료를 권했다.
사전 문답 결과 불안, 우울, 충동 3가지 항목이 높게 나왔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매우 그렇다’에 체크한 항목들은 아래와 같았다.
- 나는 미래에 나아질 것이 전혀 없다고 느낀다.
-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자주 한다.
- 대부분 타인의 삶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평생 어딜 가도 자신감 없단 소리는 들어본 적 없던 내가, 친화력이 좋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소리를 듣던 내가, 한 달 만에 음울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정확히는 일 못하고 불행한 바보였던 것 같다. 그들과의 소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튀는 아이디어는 배제하고 기존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다. 피드백이 오면 공허한 눈으로 즉시 반영해 주고 빨리 해치우기 바빴다. 이게 일 못하고 불행한 바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근본적으로 잦은 이직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던 것 같다. 5년 경력에 세 번째 회사, 그마저도 다시 한 달 만에 마주한 문제 상황. 마음 한 편에 자리 잡은 ‘내 인내심이 남들보다 약한가?’ 하는 자책감과 의구심. 그래서 이번만큼은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라도 참고 다녀볼까 싶던 찰나, 내 안의 무언가가 소리쳤다.
- 그래도 문제 해결이 안 되면, 약 처방을 늘리게?
근본적 문제 해결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과 동시에 팀장님께 1:1 면담을 요청했다.
-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조직문화가 안 맞는 것 같아서 퇴사하려고 합니다.
팀장님은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 조직문화가 안 맞으면 마케터J님이 그걸 바꿔줄 수는 없나요?
- 제가 느끼기에 이 팀의 조직문화는 몇 년에 걸쳐 완성된 관습이에요. 제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팀 분위기를 해칠 것 같아 저 하나 적응 못한 셈 치고 나가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 팀장으로서 깊게 개입할 수 없었던 건 이해해 줘요. 퇴사까지 생각할 정도로 스트레스받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일단 내 책임이 있으니 하루만 시간을 줘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선 팀장님은 그날 하루 꼬박을 보이질 않다가, 퇴근할 무렵 나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내 커리어와 필명을 바꾸게 된 결정적 질문을 던졌다.
- 마케터J님, 신사업팀으로 갈래요?
마케터J가 기획자J로 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