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지에 열심히 살게 되었다.
사회초년생
: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첫 월급은 눈이 튀어나오게 기뻤다. 아르바이트로는 벌어 본 적 없는 금액이 너무 쉽게 통장에 꽂혔기 때문이다. 갚을 빚도 없고 카드 값도 없어 부모님께 넉넉히 드리고, 여기저기 취업턱을 쏘고도 남았다. 이대로라면 매 달 명품을 하나씩 사도 남겠다는 기적 같은 결론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부모님은 오싹해지셨는지 내가 드린 용돈을 그대로 내 명의의 정기적금으로 만들어 버리셨다.
- 엄마! 이만큼씩 적금하면 난 뭐 먹고살아!
- 엄마였으면 더 했을 거야. 최소한도로 잡았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가서 해지하면 될 터였지만, 부모님께서 내 명의로 만들어 오신 걸 그렇게 쉽게 깨고 싶지는 않았다. 뼛속까지 효녀. 그렇게 명품 산다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졸지에 적금왕이 되어버렸다. 6개월쯤 지나자 돈이 모이는 게 눈에 보이면서 즐거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기적금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돈이 차곡차곡 날아와 쌓이는 느낌이었다. 1년 만에 모인 큰 금액에, 이 사회초년생은 2가지의 잘못된 생각을 하고 만다.
1. 주식 같은 재테크로 자산을 불려보자.
2. 신용점수를 높이기 위해 신용카드를 만들자.
주식 1년 차: 뭘 사도 내일이면 오르는 미친 장
처음 뛰어든 재테크는 단연 주식이었다. 코로나 직후인 2020년 3월 경, 당시는 삼성전자 우선주가 3만 원대고 오늘 사면 내일 오르는 황금장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이 아니라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어서 그랬던 건 줄도 모르고, 나는 그저 내가 투자의 귀재인 줄만 알았다. 주식이 공부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지만 그때는 더욱이 공부나 분석이 필요 없었다. 종목명이 마음에 들면 사는 수준이었는데 사고 나면 다음날 5%가 오르는 속된 말로 미친 장이었다. 이때 주식에 발을 들인 사람은 이게 정상적인 장이 아니라는 걸 알기까지 시간이 좀 오래 걸렸을 것이다. 나처럼.
주식 2년 차: 다시 살아난 테마주
2년 차부터는 뭘 사도 내일 오르는 장은 다행히(?) 막을 내렸다. 주가는 절반 가까이 회복이 되었고, 무섭게 오를 거라는 불특정 다수의 알 수 없는 목소리를 타고 테마주가 강세를 띠었다. 초심자의 행운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은 난 그제야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전기차 관련주와 메타버스 관련주로 크게 재미를 봤다. 100%가 넘는 수익률을 본 적이 있었나? 이때가 전무후무했던 것 같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주식 3년 차: -60%, 지금까지의 실력도 운이었구나!
제대로 자신감이 붙어버린 나는 투자 금액을 늘려 더욱 마이너한 종목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믿고, 지금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기업에 투자해야 100% 이상의 수익률을 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운을 타고 여기까지 날아온 3년 차 주린이는 잘 몰랐다. 동전주의 위험성을. 1년을 내리 작전 세력에게 머리채 잡힌 채로 끌려 다녔다. 그 결과는 -60%. 그것도 여러 개를 산 지라 있는 대로 뜯기고 있었다. 머리채를 더 안 뜯기려면 잘라버리는 수밖에. 그렇게 짧다면 짧은 3년간의 주식 체험이 반강제로 끝이 났다.
신용카드: 잘 쓰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게 나는 아니야.
신용카드 광고에서 주로 내세우는 키워드는 신용점수와 혜택이다. 매달 같은 돈을 쓸 거면 신용카드로 쓰고 갚는 게, 신용점수 향상과 일상 속 혜택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을 매우 강조한다. 누군가는 절제하기 힘드니 애초에 발급받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자제력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인생 첫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말았다. 그때 나는 알았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나라는 걸.
첫 달부터 기존 체크카드로 쓰던 금액을 훌쩍 넘어섰다. 잔고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결제의 위험성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문제는, 카드값은 커질 줄만 알고 작아질 줄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한 번 쓰기 시작한 신용카드를 없애기 위해서는 여태껏 쌓인 카드 값을 다 청산해야 했는데, 이미 커져 버린 소비 습관 내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카드값 최대치를 찍고 마이너스 통장까지 기웃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서야, '아, 이대로면 적금도 투자도 아무 의미가 없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른 재테크 방식을 찾기에 앞서 일단 신용카드 사용 줄이기부터 들어갔다. 보너스 같은 큰돈이 들어오는 시기를 노려 카드값 먼저 갚아나갔다. 혜택이고 우대금리고 그거 받겠다고 잃는 게 더 많아, 생활비는 체크카드 위주로 쓰기 시작했다. 3개월쯤 지났을까, 줄어든 신용카드 결제금액은 그대로 여유자금으로 돌아와 다행히 다시 적금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청약이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집 마련은 했다.
그맘때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뭘 위해 이렇게 돈을 벌고, 모으고, 투자를 하겠다고 설치고, 또다시 모으는 것일까? 그 궁극적인 지향점이 대체 뭐냔 말이다. 그건 바로 집이었다. 40대쯤 서울에 자가 아파트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적금과 주식만으로는 그 종잣돈이 평생 모이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 실력으로는.
적금을 10년 동안 모은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얼마를 모았든 서울 집 값은 그것보다는 훨씬 큰 폭으로 올라있을 것이다. 주식에 돈을 몽땅 모아뒀다가 집 값이 떨어졌을 때 부랴부랴 부동산을 사려고 보면 내 주식은 이미 반의 반토막이 나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방식 다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펀드, 채권 등 다른 투자 방법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걸 전공했고 밥만 먹고 그 공부만 하는 사람들도 확실한 수익률을 보장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공부해서 되는 거였으면 전공자들은 이미 다 부자가 됐겠지. 그래서 결국 '어설픈 투자로는 집은커녕 죽도 밥도 못 산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다 제하고 나니 한 가지 대안책이 남았다.
: 수도권 아파트 청약 (서울 제외)
수도권 아파트는 서울 집값에는 못 미치더라도 10년쯤 지나 서울 집값이 올라있으면 소폭으로 함께 상승해 있을 자산이었다. 그래서 서울 아파트를 매매하기에 가장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대비책이라는 판단이 섰다. 게다가 청약에 당첨될 경우 가장 낮은 가격인 분양가에 매매가 가능하고, 중도금 대출과 잔금 대출도 가능하기 때문에 당장 큰 목돈이 필요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왜 바로 서울에 청약을 넣지 않고 수도권을 노렸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분양가부터 감당이 안 되니까. 아무튼 전에 없던 생애최초 특별공급이라는 것도 생겼겠다,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소득세 납부 5개년 미만으로 생애최초 특별공급 불가.
말했듯 나는 20대 3년 차 직장인이었다. 당연히 미혼이기에 신혼부부 특별공급은 해당이 안 됐고, 노려볼 만한 것은 생애최초 특별공급이었는데 자격 요건이 일생동안 주택 소유 한 번도 안 해봤으면 그걸로 땡- 이 아니었다. 소득세를 5개년 이상 내야만 생애최초 특별공급 청약 자격이 주어졌던 것이다. 직장 생활을 5년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1년에 단 하루라도 일용직 아르바이트 등에 의한 소득세 납부 이력이 있으면 그것도 1개년으로 인정해주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 외에 소득세 납부 이력이 없었던 나는, 결국 1순위 추첨제밖에 노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청약을 넣은 기준은 심플했다.
- 서울 제외 수도권 (경기, 인천)
- 1순위 추첨제 물량 있어야 함
- 통근 시간 편도 1시간 반 이내
사실 저 3가지에 해당하는 매물 자체가 많지도 않았거니와, 허허벌판에 대중교통은 커녕 택시도 오기 힘들어 보이는 지역을 걸러내면 거의 눈에 보이는 족족 넣어야 했다. 그래서 매일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눈에 불을 켜고 이번 달 1순위 아파트 목록을 보고, 입지를 분석하고, 청약을 넣었다. 한 6개월 정도 출근길 청약 넣기가 습관이 되어갈 때까지, 당연히 하나도 당첨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청약을 넣고 있었다. 오늘은 흔치 않게 조건에 부합하는 매물이 2개나 있어서 '정신 바짝 차리고 둘 다 잘 넣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신청 중이었다. 그런데 한 개를 넣고 두 번째 청약을 넣으려던 순간 '당첨자 발표일이 같은 청약은 동시에 접수할 수 없다'는 알림 창이 떴다. 오늘 넣으려던 2개 청약의 당첨 발표일이 같았던 것이다. 하나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난, 홀로 지하철 안에서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이미 접수해버린 A아파트는 인프라는 좋았지만 통근 시간이 길었고, B아파트는 인프라는 상대적으로 미비하지만 서울까지 가는 교통수단이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브랜드는 A아파트가 더 유명해서 시세 차익을 기대하려면 A아파트가 나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내 궁극적인 목표를 잃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 집 마련이 목적이니 난 실거주를 할 텐데 그럼 가장 중요한 건 서울과의 접근성 아닌가? 시세 차익은 수반되면 좋지만 어쨌건 부수적인 요건에 그쳐야 한다.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순간 전전긍긍 영끌족이 된다.
결국 A아파트 청약 접수를 취소하고, B아파트로 재접수했다. 한편으로는 둘 다 안 될 거 괜히 혼자 열렬히 고민했나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 빅데이터로 봤을 때 안 될 확률이 훨씬 더 높으니. 이 날의 치열한 접전을 잊고 살아갈 때쯤, 평소와 다름없이 기상 알람에 눈을 뜨고, 새벽 새 온 연락은 없는지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 000님, B아파트 00동 00호에 당첨되셨습니다.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