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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지 않는 인간

by 태현

#표지 그림: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식 식당>, 1927.



'희망'에 관한 한 나는 냉소적이다. 서글프지만 그렇다.(중략)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나는 열망에 대한 기대를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나를 바꾸는 건 열망이라기보다는 세월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희망하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희망,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는 반짝이는 그 단어가 나는 늘 버거웠다.

아마도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보다는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의 절망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력하고 공을 들였음에도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경험들이 짧은 생에서나마 종종 있었다. (중략)

“불합격입니다. 전화선 너머로 들려왔던 건조한 기계음, 나를 둘러싼 세계가 일순간 암전되는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내 안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 '나는 역시나, 안 되는구나....."

- 작가 '곽아람'의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2009)> 중 "희망 역시 내가 만든 우상이 아니던가"에서 발췌 인용


'곽아람'의 두 번째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2009)>


어떤 작가(그녀의 책)를 계속해서 찾아 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함께 걷는 일과 닮아 있다. 작가 "곽아람"의 글을 처음 접했던 시기는 내가 막 40대의 중반을 넘어서던 시절이었다.


나는 곽아람 작가를 좋아한다. 물론 일면식도 없지만 책을 통해 알게 되면서 언젠가는 꼭 한 번 커피 한 잔 마시며 책 내용에 대해, 각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마침 그녀의 연배는 나와 비슷하다.



곽아람 작가의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첫 책 「그림이 나에게(2008)」를 읽으며 알게 된 그녀는 세상을 ‘빛의 족속’과 ‘어둠의 족속’으로 나누고 자신을 후자에 두었다.

'곽아람'의 첫 번째 책 <그림이 그녀에게(2008)>


'밝지만 차가운 빛'보다는, '가려져 있지만 따뜻한 어둠' 쪽에 서 있다는 고백.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이상하게 위로를 받았다. 나 역시 빛보다는 어둠 쪽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글은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거울 같았다. 세상을 살아내는 방식,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 희망이라는 단어 앞에서 주저하는 감정까지 닮아 있었다.


그녀의 글에는 오랜 세월 쌓인 '불안'이 배어 있었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고등학교 시험을 치르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자유를 얻었지만 도리어 방황했던 대학 시절의 당혹감을, 학교에서 우등생이 직장에서 통하지 않는 자신의 무력감을 담담히 고백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유독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불안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서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라는 사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나이를 먹어도 끝내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의 삶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적어낸 문장은 마치 내 언어인 듯 와닿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곽아람이라는 이름을 단번에 마음에 새겨 두었다.




두 번째 책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2009)」를 읽으면서도 그 친밀감은 이어졌다. 오히려 좀 더 내밀한 고백들을 따라가며,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희망보다 기다림을 택하는 태도,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고백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책 속에 있는 작가 '곽아람'의 프로필


희망을 말하면 사람들은 먼저 빛을 떠올린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 막힌 길이 트이는 순간, 오래 기다린 편지가 도착했을 때의 심장 뛰는 소리. 나도 그런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려 애썼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이 내 안에 쌓일 때마다, 나는 반대로 먼저 어두운 뒤틀림을 느꼈다.

빛이 사라졌을 때의 공허, 기대가 무너졌을 때의 피로, 그리고 그 뒤에 남는 '왜 나였을까'라는 조용한 질문들. 그것들이 희망을 향한 내 태도를 조금씩 바꿔놓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희망을 '결과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예감'으로 읽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방어기제라고 부를지 모른다. 나는 그걸 단지 내 생활의 방식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받아들였다.


희망을 품지 않음으로써 오는 무덤덤함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실패들에 지친 나를 지탱하는 보호막이었다. 그 보호막 덕분에 나는 매번 크게 무너지지 않았고, 그 대신 느릿하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희망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동시에 다른 종류의 감각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기쁨이 와도 머뭇거리게 되고, 기대가 올라도 그것을 누릴 줄을 모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희망의 반대편에 서 있는 '기다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기다림은 결과를 향한 초조함만을 뜻하지 않는다. 기다림 속엔 읽지 않은 책 한 권, 아직 다 쓰지 못한 편지, 창문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바라보는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들은 희망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살게 했다.



최근 곽아람 작가의 신간 「나와 그녀들의 도시(2025)」를 읽으며 조금 낯선 감정에 사로잡혔다.


가장 최근에 출간한 책 <나와 그녀들의 도시(2025)>


이제 곽아람은 대형 신문사의 출판팀장이 되어 있었다. 각종 출장길을 오가며, 또 뉴욕대학교 방문 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본인이 좋아했던 책들의 작가들을 찾아가는 발자취를 따라 문학기행 책을 쓰고 있었다.


빛에 속한 족속처럼 세상을 환히 바라보는 시선, 성취와 안정의 무늬가 그녀의 글 속에 묻어 있었다. 예전처럼 ‘나는 어둠의 족속’이라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순간 서운했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는 사라진 것만 같았으니까.


물론 그녀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변한다. 글도 사람을 닮아 나이를 먹는다. 하지만 한 독자로서 나는, 여전히 오래 전의 곽아람을 찾고 있었다.


거실 책장에서 그녀의 책들을 꺼내 다시 정독했다. 밑줄을 그어 가며, 그녀의 문장을 붙잡듯이. 거기에는 나와 닮은 고백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그 시절의 그녀가 소중하다. 작가가 변했어도, 독자는 변하지 않은 채 그때의 문장을 다시 읽는다. 그것이 내가 곽아람의 책을 붙드는 방식이고, 내가 글을 읽으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희망을 냉소적으로 보는 나의 태도는 여전히 나의 일부다. 그러나 그 태도가 전부가 되지는 않게 하려고 애쓴다. 희망과 냉소 사이, 절망과 미소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책에서 그 여정을 찾고 있다.


곽아람의 글을 오래 따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글에서 가능성과 불안을 함께 읽으며 내 삶을 비추어 본다.


지금은 그녀의 체념과 분별 속에서 나 역시 중년의 길목에 들어섰음을 느낀다. 작가의 문장은 결국 독자의 거울이다. 나는 그녀가 변했음을 보며, 동시에 내가 변했음을 인정한다. 그것이 서운함과 동시에 묘한 위로가 된다.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식 식당>, 1927.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삶은 늘 정지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창가의 여인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햇살은 조금씩 각도를 달리하며 방 안의 색을 바꾼다. 곽아람의 글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 방 앞에서, 그녀의 글을 매개로 나의 세월을 함께 마주한다.


작은 문장 하나에 머무르고, 그 머무름이 주는 온도를 느끼는 일이 여전히 내게는 살아가는 방식이다. 결국, 모든 기다림의 순간에 나는 책을 읽는다.


희망을 하는 대신, 기다림을 곁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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