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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Apr 16. 2023

천일야화

밤마다 책 읽어주는 아빠.

  술탄은 셰에라자드와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의 침상은 동방의 군주들의 방식대로 높은 단 위에 놓여 있었으며, 디나르자드의 침상은 그 단 밑에 마련되어 있었다.

  동트기 한 시간 전, 잠에서 깨어난 디나르자드는 잊지 않고 언니가 시킨 대로 큰 소리로 말했다. 「언니! 만일 자고 있지 않으면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조금 있으면 동이 틀 터인데, 그때까지 언니가 알고 있는 그 많은 재미난 이야기 중 하나를 들려주세요! 아아! 이런 즐거운 시간도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요!」

  셰에라자드는 동생에게 대답하는 대신 술탄에게 말했다. 「폐하! 제 동생의 청을 들어주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나이까?」「기꺼이 들어주겠소.」 술탄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셰에라자드는 샤리아 쪽으로 몸을 돌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폐하! 옛날에 큰 재산을 가진 상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땅 부자에다 상품을 산더미같이 갖고 있었으며, 현금도 넘쳐 났습니다.  …….


「천일야화 1」, 앙투앙 갈랑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5, p.45.




  나는 밤마다 딸애의 잠을 이끌기 위해 책을 읽어준다.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잠들기 힘들어 했던 딸애를 자리에 조용히 눕히고 잠들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딸애에게 있어 잠이란 두려운 존재였다. 그것은 정체가 불분명한 이질적인 뭔가가 다스리는 세상이었다. 그곳에서는 엄마, 아빠도 도우러 오지 못했고 괴기스럽거나 이상한 몸짓의 녹색 괴물이 나오기도 했으리라.   


  게다가 어두운 밤에 불을 꺼야 한다는 사실이 한층 더 불안하게 했다. 아무리 엄마, 아빠가 누워서 손을 잡아주고 있어도 그녀의 공포를 자극하는 그 무엇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밤마다 늘 수면등을 켜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잠은 무서웠다. 잠을 자려면 눈을 감고 조용히 기다려야 하는데 눈을 감으면 갖가지 상념이 딸애를 불편하게 했다. 양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아무리 세어보아도 머릿속은 점점 또렷해지면서 아까 놀이터에서 친구가 들려준 무서운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딸애의 무서움에 대한 망상을 다른 데로 옮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한 책읽기는 초등학교 4학년인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밤에 책을 읽는 행위는 하나의 경건한 의식이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정신들을 차분히 다시 모아 온전한 하나로 정돈한다. 사제의 기도문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하루를 정리한다.


  그렇게 하나가 된 마음은 밤이면 나타나는 사악하거나 기이하거나 요사스러운 망상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결계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곤 각자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서 떠나간다.




  「천일야화」는 6세기경 페르시아에서 전해지는 갖가지 이야기를 아랍어로 기술한 설화인데 ‘아라비안나이트’라고도 불린다.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는데 아마 무수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이룩되었을 것이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짜여져 있다.


  6세기경 사산왕조 때 페르시아에서 모은 <천의 이야기>가 8세기 말경까지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여기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다시 많은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그 후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하여 15세기경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영리한 처녀 ‘셰헤라자드’가 샤리아 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술탄인 ‘샤리와 왕’은 왕비의 부정에 충격을 받아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를 하고 날이 밝으면 그 처녀를 죽였다.


  셰헤라자드는 그러한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에로틱하고,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왕은 그녀를 죽일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천일하고도 하루가 지난 뒤, 마침내 모든 이야기를 마친 세레라자데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들 알다시피 샤리아 왕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 그녀를 살려두고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의 진정한 정수는 그 이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이 아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스한 연민이다. 황당무계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 내면 깊숙한 욕구들에서 비롯된 경이로운 마법,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이 아닌 자유와 정의를 갈망하기에 터져나오는 건강한 해학과 풍자이다.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 속에서는 넘치는 스릴과 호기심을, 끊임없이 등장하는 왕자와 공주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는 순수하고도 솔직한 열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힘차게 뛰고 있었던, 그리고 여전히 뛰고 있는 인간 마음의 진실인 셈이다.


  왕비의 배신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왕이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된 셈이니, 이야기의 힘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오늘 밤에도 나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요즘 읽어주는 책은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4’이다. 10권이 완결이니 끝나려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조금 전까지 엄마, 아빠와 티격태격하며 온갖 심술을 부리던 딸애도 책 읽기를 시작하자 결국은 체념하고 자기 자리에 눕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 그 속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이야기가 된다. 


  두세 페이지 정도 읽었을까 하는데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잠들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든다. 그렇게 쉽게 ......  


  천일(天日)하고도 일일(一日)을 이야기 해준 그 노력이 하늘을 감동시켜 삐뚤어진 한 인간의 심성을 고쳐먹게 했다는데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책을 읽어준 우리에겐 어떤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곧 딸애도 엄마, 아빠의 품을 벗어나 자기 방에서 혼자 자겠다고 할 것이다. 얼른 그 날이 오기만을 조바심 내면서도 사실은 그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품 안의 자식이라지만 딸애가 일정 나이가 되면 부녀지간은 지금처럼 살갑게 지내지 못하리라. 딸애는 아이에서 ‘소녀’로 성숙하고 아빠는 ‘아버지’로 고리타분해 질 것이다. 그게 누구에게나 주어진 인생사이다.



  무작정 그런 생각을 뒤따라가다가 문득 아련한 상실감이 밀어올린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란 그런 존재이다. 그저 한숨으로 텅 빈 마음을 채워야 하는 고독한 존재 말이다. 요즘 들어 자꾸 아버지가 생각난다.


  내일은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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