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그림: 조르조 모란디, <Still Life>, 1929.
뉴욕은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 빠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캘리포니아가 뒤쳐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22세에 졸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5년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25세에 CEO가 됐습니다. 그리고 50세에 사망했습니다.
반면 또 어떤 사람은 50세에 CEO가 됐습니다. 그리고 90세까지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미혼입니다.
반면 다른 어떤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오바마는 55세에 은퇴했습니다.
반면 트럼프는 70세에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시간대에서 일합니다.
(중략)
그들은 자신의 시간대에 있을 뿐이고, 당신도 당신의 시간대에 있는 것뿐입니다.
인생은 행동하기에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 작자미상의 글 인용
이 문장을 처음 본 건 몇 년 전이었다. 그때는 꽤 반짝였지만, 그저 ‘좋은 말이네’ 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얼마 전 이 문장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 그건 아마도, 내 딸애 때문일 거다. 그리고 내가 ‘부모’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요즘 딸애와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문득 돌아보면, 언젠가부터 ‘응’, ‘몰라’, ‘됐어’가 대화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질문은 많아졌지만 대답은 짧아졌고, 걱정은 많아졌지만 위로는 서툴렀다.
그럴 때면, 나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하는 거 아닐까? 무언가 더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엔 더 멀어지진 않을까?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어느새 아이를 ‘앞세우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딸애는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숫자는, 나에게는 그저 "아직 어린아이"를 뜻했지만, 그 아이는 이미 자신의 세계를 갖기 시작했다. 생각도, 감정도, 무엇보다 ‘거리두기’의 방식도 달라졌다.
요즘 딸애의 일상은 거의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눈 뜨자마자 카카오 채팅, 짧은 영상, 게임, 짤, 이모티콘. 아내는 이를 "중독"이라고 말한다.
사실 나도 걱정이 되긴 한다. 하지만 그 중독이라는 단어에 '절망'이 묻어날까 봐 나는 선뜻 그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딸애는 독서를 좋아하던 아이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책 대신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단락을 따라가야 하고, 문장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영상은 다르다. 흐름을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빠르게 지나가며 순간적인 감정만 자극하면 그만이다. 더 이상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아이에게는 그게 쉬운 길일지 모른다. 아내는 가끔 혼을 낸다.
"또 폰이야? 숙제는?"
"눈 나빠진다니까!"
"하루에 몇 시간을 보는 거야 도대체?"
딸애는 대답 대신 문을 닫는다. 요즘 아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냥 거리 두는 법을 먼저 배운다.
어떤 날은 내가 대신 딸애의 방문 앞에 선다. 무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정작 꺼낼 말이 없을 때가 많다. 무엇을 말하든 ‘간섭’이 될까 봐. 무엇을 안 말하든 ‘방임’이 될까 봐.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빠르다. 혹은 빠르게 살려고 애쓴다. 내가 걸어온 세상은 그런 곳이었다.
‘더 빨리 이해하고, 더 빨리 결과를 내고, 더 빨리 도착하는 사람’이 박수를 받는 곳. 어떤 일을 시작했다면 마무리는 언제든 ‘성과’여야 했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같은 속도를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딸아이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나는 자꾸 그 뒤에 숨어 있는 게으름, 회피, 무기력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내 시선이고, 아이에게는 ‘쉼’이고, ‘관계’이고, ‘자기만의 공간’ 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지금 자기 시간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속도로, 내가 알지 못하는 정서로. 그리고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단지 ‘다른 것’ 일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사랑하는 이 아이는 어쩌면 뉴욕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에서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뉴욕처럼 빠르게 걷고 있고, 딸아이는 캘리포니아처럼 천천히 자란다.
하지만 둘 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방식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기다린다’는 말은 언제나 수동적인 태도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짜 기다림은 기꺼이 멈추는 '용기'에서 출발한다.
내가 한 발 늦춰 서야 딸애와의 간격이 한 발 줄어든다. 내가 먼저 조급함을 내려놓으면 그때야 아이는 자기 언어로 입을 열 것이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걷는다는 건 내 걸음을 일부러 늦추는 일이면서도, 결국엔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누군가는 스스로를 먼저 발견하고, 누군가는 한참 뒤에야 자기 길을 본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늦지 않았다. 늦는 게 아니라, 그저 각자의 해가 뜨는 시각이 다를 뿐이다.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를 바라보면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다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고, 침묵하는 것들 사이에 시간이 쌓여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딸을 키우며, 나 자신의 속도를 되묻는 생각이 많아졌다. 우리는 같은 하루를 살지만,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자라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삶에는 다다를 필요가 없는 도착점이 있다는 생각.
이제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