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과 소설
상강(霜降)이 지난 후 논과 밭이 휑해지기 시작했다. 서리를 맞으면 안 되는 녀석들을 모두 거두어들인 덕이다. 겨울을 나도 끄떡없는 배추, 무, 마늘 같은 것들만 남았다. 그마저도 배추나 무는 김장철에 모두 뽑힐 것이다. 이제 논과 밭이 아이들 차지가 되었다. 추수를 마친 논에서 이삭을 줍거나 맘껏 뛰어놀기도 하고, 고구마를 다 캐간 밭에서 남은 고구마를 줍거나 붉은 황토로 흙놀이를 하기도 한다. 황토밭을 열심히 파다 보면 미처 캐가지 못한 커다란 고구마를 찾아내기도 하는데 그날은 횡재하는 날이다. 그런 날은 아이들이 더욱 땅파기에 집중하게 된다. 가을의 끝자락, 밖을 나오면 마주하게 되는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푸른 하늘이랑 바람이 부는 대로 머릿결 나풀거리는 금빛 억새의 춤사위를 바라보느라 교사는 아이들을 가끔 시야에서 놓치게 되지만, 아이들은 한참을 앉아서 땅을 파고 노느라 걱정이 없다.
겨울을 준비하며
입동 무렵이 되면 햇살가득은 겨울에 먹을 음식들을 말리기 시작한다. 더 추워지면 그나마 말릴 재료들도 없기 때문에 이 시기에 부지런히 말려야 한다. 나들이를 나가서 열심히 주워 온 고구마를 맛단지 교사가 쪄주면 아이들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말린다. 칼을 사용하는 일이라 7살 아이들에게만 주의를 주고 조심히 칼질을 하도록 하는데 그게 부러운 동생들은 옆에서 말똥말똥 쳐다본다. 그러다 고구마 한두 개 얻어먹으면 기분이 좋아져 그제야 다른 놀이를 하러 자리를 뜬다. 그렇게 말려 놓은 고구마는 썰어놓을 때는 많아 보여도 말려놓으면 언제 말려놓았나 싶게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곳간에 생쥐 드나들 듯 어찌나 들락날락하는지 어쩔 땐 미처 다 말리기도 전에 사라질 때도 있다. 그것에 비하면 무는 인기가 없는 편이다. 무를 말려서 한 번 덖은 다음 아이들 오전 간식 시간에 따뜻한 차로 내어주는데 자신들이 직접 썰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를 말려서 차로 끓이면 들큼한 맛이 진해져서 어른들도 호불호가 있는데 아이들이 한참 기침을 달고 살기 시작하는 이 계절에 기관지에 매우 좋은 음식이라 일부러 아침열기(등원을 마친 아이들과 하루를 함께 여는 의식) 시간에 매일 준다. 아직 맛에 대한 편향이 덜한 아이들은 따뜻한 기운에 망설이지 않고 잘 마시는 편이다. 여기에 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햅쌀 현미를 볶아서 함께 달여 조금 더 고소하게 주기도 하고, 설탕에 재운 생강을 넣어 달달하게 주기도 한다.
말리는 음식 중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역시 감이다. 한참 붉게 익기 시작하는 대봉감을 아이들이 자르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또 주변으로 모여든다. 아직은 떫어서 먹기도 힘든데 아이들은 그것도 맛있다며 날름날름 집어 먹는다. 그러다 똥을 못 누게 될 거라고 말해도 먹성 좋은 아이들은 놀다가도 한 번씩 들러서 주워 먹고 간다. 감말랭이는 바로 말려서 먹을 수 있어 좋은데 통째로 껍질을 깎아 말린 곶감은 매우 참을성이 필요하다. 아이들 수만큼 곶감을 만들려면 매우 많은 감이 필요해서 어차피 아이들마다 한두 개씩밖에 먹지 못하지만 곶감을 깎아서 매달아 놓으면 그날부터 몇 밤을 자야 하는지 교사에게 입이 닳도록 물어본다. 이때 교사는 몇 밤을 자야 하는지 매우 넉넉하게 이야기해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셈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은 정확하게 며칠이 남았는지 자꾸 알려줘서 자칫 교사가 거짓말쟁이가 되기 쉽다. 가끔 곶감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손으로 꾹꾹 눌러보고 있으면 아이들은 어느새 ‘이제 먹어도 돼요?’하며 교사 곁에 와서 눈을 반짝이고 있다. 꾸덕꾸덕 마른 곶감은 어찌나 달큼한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이토록 감을 맛있게 먹을 생각을 했을까 감탄하게 된다. 이맘때 아이들은 겨울 동안 지낼 체력을 감을 먹어 비축하나 보다 싶게 거의 매일 감을 먹는데 그렇게 먹어도 질리지도 않는지 나들이를 나가면 보이는 감나무마다 익은 감을 찾느라 놀이는 뒷전이다.
감나무의 감도 다 떨어지고 다시 터전 뒷산에서 뛰어놀기 시작하면 나들이를 끝내고 터전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옷을 모두 뒤집어 잘 살펴보는 일이다. 정신없이 풀밭을 헤치고 다녔던 터라 아이들 옷에 도깨비바늘이며 도꼬마리며 우슬(쇠무릎) 씨앗이 다닥다닥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도 많이 붙어 있어 모두 달라붙어 같이 뜯어줘야 한다. 식물들도 겨울을 나기 위한 방편인데 졸지에 우리 아이들이 씨앗 전파자가 되어버렸다. 씨앗을 하나하나 뜯어내 버리지 않고 모아보자고 했더니 제법 많은 양이 되었다. 그리고 모은 김에 다른 씨앗들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름내 형형색색 예쁘게 터전 주변에 얽혀있던 나팔꽃들도 씨앗이 되었고, 봄날 맛있는 간식이었던 찔레도 빨갛게 열매를 맺었으며, 흔하디 흔한 돌콩에, 결명자도 간혹 눈에 띈다. 빈 논에서 주웠던 이삭도, 뒷산에서 주웠던 도토리, 솔방울도 씨앗을 품고 있어 모아보았다. 교실에 돌아와 종이상자를 접어 씨앗들을 담아 놓으면 생각보다 풍성하다. 농부들이 가을 갈무리를 하듯 우리 아이들도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며 충실히 갈무리를 한 셈이다. 이렇게 모은 씨앗은 내년 봄 다시 땅으로 돌려주기로 아이들과 약속했다. 그동안은 겨울 내내 교실 한구석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이 씨앗들이 내년 봄을 기다리며 옹골찬 생명을 품고 조용히 겨울을 나듯, 우리 아이들이 품은 씨앗들도 겨울 동안 더욱 영글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