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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Dec 16. 2022

눈 오는 날

 오늘은 터전 주변이 온통 와글와글하다. 눈이 와서 따로 나들이 가지 않고 터전 주변 눈 쌓인 곳마다 아이들이 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터전 뒤편으로 나 있는 오르막 길은 최고의 눈썰매장이다. 요란스러운 소리의 근원지는 백발백중 그곳에서 나는 소리이다.      


 사실 나는 아침 출근길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오늘 하루 아이들과 즐겁게 놀기 위해 아침도 단단히 챙겨 먹어야 했다. 눈이 온 날은 출근부터 긴장의 시작이기 마련이다. 눈이 쌓이면 버스 운행 또한 조심스럽다. 특히 터전으로 가는 길은 제설작업이 안 되는 시골지역이라 도착할 때까지 안심하면 안 된다. 하지만 온통 하얀 세상을 버스 타고 지나가는 건 매우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가끔 책 좀 읽는다는 아이가 표현하기를, 터전 주변을 둘러싼 산에 하얗게 쌓인 눈을 보고 히말라야 같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그만큼 터전으로 향하는 내내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답다.



 "와~!"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별안간 아이들의 탄식 소리가 들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이 향하는 시선 끝을 보니 하얀 눈에 쌓인 터전이 보였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았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새하얀 눈밭. 나도 아이들 따라 절로 탄성을 터뜨렸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순수한 '우리' 눈이다. 내가 먼저 발자국을 남길 수 있고, 저 눈을 몽땅 뭉쳐 가지고 놀 수도 있다. 우리 것이라서인지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다.

 

 감탄은 했지만 터전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는 길은 덕분에 조금 힘들다. 아직 걷기가 완벽하지 않은 3살 아이들은 안아서 데리고 가야 하고, 이미 눈을 만지고 뭉치고 있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조금 있다가 나들이 시간에 나와서 놀자고 달래기도 해야 하며, 교사 말은 귓등으로 흘려 듣는 아이들은 손을 꼭 잡고 데리고 들어가야 하고, 이미 눈밭을 굴러버린 아이들은 젖지 않게 옷도 잘 털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가 시작도 되기 전 벌써 하루의 반틈은 살아버린 느낌이랄까. 교실에 들어서도 아이들은 오늘 무슨 놀이를 할 것인지 벌써 수다 삼매경이다. 들뜬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나머지 아이들이 등원하기 전까지 차분하게 오전 놀이를 해야 한다. 부지런히 목도리를 뜰 뜨개실과 직조 짜기로 아이들을 유혹해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집에서부터 커다란 비닐봉지를 몇 개 챙겨 온 아이들은 눈썰매 조를 이미 모집하고 다녔다. 준비성 좋은 가정은 이렇게 아이가 터전에 가서 눈놀이를 즐겁게 하라고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겨주신다. 하지만 이런 집도 있고 저런 집도 있듯이 바쁜 아침을 전쟁처럼 치른 가정 중에는 장갑조차도 챙겨주지 못한 부모들도 있다. 맨손으로 눈을 만져도 하나도 손이 시리지 않다는 아이들이지만 오랜 시간 눈놀이를 하자면 장갑은 꼭 필요하기에 있는 것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 그중 가장 만만한 것이 양말인데 아직 손가락장갑을 착용하기 힘든 어린아이들에겐 가장 맞춤한 장갑 대용이기도 하다. 여벌로 가져온 자신의 양말을 손에 꼭 씌워주면 아이들도 만족스러워 한다. 생각보다 따뜻하기 때문이다. 가끔 교사의 장갑이 탐이 나서 교사 것을 가져다 쓰는 아이도 있는데 그럴 경우를 대비해 교사도 장갑을 고급스러운 것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눈 오는 날 최고의 놀이는 역시 눈썰매 타기이다. 오늘도 아이들이 각자 집에서 가져온 아이템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농사도 짓지 않는 집에서 어떻게 저런 게 있을까 싶은 비료푸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온 아이도 있는데, 대개는 아이들 엉덩이보다 더 큰 비닐봉지가 가장 썰매 타기에 좋다. 손잡이 부분을 가랑이 사이로 오게 해서 손잡이 용도로 사용하면 더욱 쓸모 있는 썰매가 된다. 더러는 눈썰매 용으로 나온 플라스틱 썰매를 가져오는 아이도 있는데 부피가 커서 터전에 가지고 왔다가 다시 집에 가져가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한 두 번 타다 보면 비닐봉지만큼 좋은 썰매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돼 결국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기 다반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썰매는 하나인데 그것을 타고 싶은 아이는 엄청 많아서 형평성 있게 타고 놀기도 힘들고, 가져온 아이가 주인 행세를 하면 꼭 상처받는 아이가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걸 가지고 온 아이가 즐겁게 노는 것도 아니다. 놀이가 즐거운 건 다 같이 해서 인데 혼자서 욕심내며 놀다 보면 다 같이 노는 즐거움은 하나도 누리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썰매를 타기 위해 그것을 들고 다니며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아이들에겐 거추장스러운 일이어서 결국 플라스틱 썰매는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기 일쑤다. 비닐봉지는 한 손에 들고 다니기도 편할 뿐만 아니라 내 몸에 안성맞춤으로 변형도 가능하다. 모든 게 다 귀찮은 아이들은 그냥 맨몸뚱이로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옷이 찢어지는 경우도 있어 그나마 비닐봉지라도 들려주면 그걸 사용하니 눈 오는 날 최고의 놀잇감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이날만큼은 모든 걸 잊고 아이들과 비닐썰매를 타고 논다. 내가 오늘 아침 눈을 뜨고 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이거 때문이었을까? 


 뒷산 언덕길에 눈이 쌓일 만큼 적설량이 많지 않은 날엔 약간의 비스듬한 경사로에 생긴 빙판이 썰매장을 대신한다. 미끄러운 길을 다니는 것이 여간 고역인 나는 이렇게 생긴 반짝이는 빙판이 두렵긴 하지만 아이들이 그토록 깔깔대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만두라고 할 수가 없다. 이런 빙판은 비닐봉지보다는 마당에 있는 헌냄비 놀잇감, 밥그릇 놀잇감 등이 더 좋다. 봅슬레이처럼 조금 달리다가 잽싸게 냄비 안으로 쏙 들어가면 속도감이 제법 있어서 눈썰매만큼이나 즐거운 놀이다. 아이들 노는 모습에 한참을 같이 웃으며 쳐다보고 있자면 다시 어려져서 같이 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아이들은 어쩜 가르쳐주지도 않은 놀이를 저렇게 잘도 찾아낼까.   

  

 오늘따라 터전 마당이 꽤 작아 보인다. 썰매 타는 아이,  눈싸움을 하는 아이,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 눈밭에 누워 팔다리를 허우적대며 천사를 만드는 아이, 떨어지는 눈을 받아먹는 아이, 아직은 차가운 눈을 만질 용기가 안나 교사 옆에 붙어 있는 아이까지 눈 오는 날 아이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고 하나같이 활기가 넘친다. 추운 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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