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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Apr 30. 2024

아주 오만한 글, 명품학부모 안내서

12. 자식을 망치는 비법 2

  너무 빨랐던 조기교육

  참고로 선생님은 아이의 자리가 2 분단의 제일 앞자리라고 했다. 아이의 알림장을 펼쳐 본 부부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아이의 알림장엔 도대체 알아볼 수 없는 엉터리 글자들이 씌어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다시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퇴근 전이었다. 엄마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처음엔 선생님을 의심했다고 했다. 엄마는 아이가 언제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글씨도 얼마나 일찍부터 쓴 아이인지 아느냐고 항변했다고 했다. 다 듣고 난 선생님이 하셨다는 조용한 말 한마디에 엄마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아이를 안과에 한 번 데려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의 시력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마이너스가 

  나오다니요?'


  안과의사는 부모를 꾸짖었다. 아이의 안경을 맞추면서 부부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졌다. 아이가 학교를 다녀오면 부부는 언제나 아이의 알림장을 펼쳐 보았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건만, 아이는 입학 전의 칭찬꾸러미에서 꾸지람꾸러미로, 부모의 한숨받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한밤중이었다. 잠결에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아빠가 깜짝 놀라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아이가 문제지를 펼쳐놓고 엎드려 울고 있었다. 아이를 다독여 말을 걸어보니, 학교에서 함수라는 걸 배웠는데, 도대체 함수의 개념을 모르겠어서 속상해 울고 있었단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판서를 하며 열심히 설명하셨지만, 글씨가 어룽거려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단다. 아빠는 슬픔을 지그시 깨물고서 말없이 아이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숨을 들이 켠 후 아이의 눈을 보고 웃어 주었다.

  ‘함수란 건 말하자면 바구니와 같은 거야 ‘

  아이에게 도란도란 함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눈물을 닦고, 아빠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어 알겠니? 하고 묻던 아빠를 가만 바라본다. 그러더니 이제 방에 들어가 자야겠다며 몸을 일으킨다. 문고리를 당기며 뒤돌아보곤 아빠를 향해 씩 웃어준다.


  다음날 부부는 아이가 학원엘 가고 난 뒤, 커피잔을 놓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간의 자기들의 실수를 진심을 다해 처음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긴 시간이었다.

  "중간쯤의 성적이면 어때?"

  "그래, 그래도 밥은 먹고살지 않겠어?"

  "이제 아이가 행복한 쪽으로 놓아주자고."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았던, 아이의 어렵겠다던 눈 수술이 성공적이랬다. 더 늦지 않게 의과학이 이 만큼 발달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나 어릴 때 실은 책 읽는 거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

이제 아이는 부모와 함께 맥주잔을 부딪힐 만큼의 나이가 되었지만, 부부는 아이의 그 말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잘 놀아야 했건만

  아이가 두 돌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빠는 아이를 안고 거리를 산책하는 걸 좋아했었다. 아이와 함께 즐겁던 산책길 중간쯤엔 맥주 가게가 있었다. 맥줏집 유리창엔 거리를 향하여 푸른색과 빨간색의 ‘호프’, ‘치킨’이란 광고 낱말이 번갈아 번쩍거렸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조명 글자가 파랗게 빨갛게 바뀔 때마다, 아빠는 아이에게 ‘호프’, ‘치킨’을 번갈아 읽어주곤 했다. 아이에게 따라 읽어도 보게 했다. 그러다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가게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곤 ‘아이에게 아빠가 저 글자를 잊어버렸네. 어떻게 읽지?’ 하고 근심스러운 낯빛을 했다. 그때였다. 아이가 ‘호프, 치킨’하고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정말 놀라서 ‘뭐라고?’를 연발하며 아이에게 잊어버렸던 글자를 다시 배우는 척했다. 글자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새로 배우는 척했다. 아이의 눈망울이 맑았고, 발음이 명료했다. 집에 돌아와 달력 뒷면에 ‘호’ 자와 ‘프’ 자가 들어간 글자, ‘치’ 자와 '킨' 자가 들어간 낱말을 썼다. 아이가 정말 네 글자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었다. 문장 속에서도 네 글자만은 분명히 짚어 읽어내고 있었다.


  아이와의 산책길이 시내로 바뀌었다. 시내에는 크고 분명한 간판과 더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글자와 낱말들이 많았다. 서점에 있는 낱말 카드를 번갈아 보여주며 아이가 아는 글자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리에서 낱말 카드를 구입하여 아이 손에 들려주었다. 아이에게 본격적으로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부가 모두 같았다. 얼마 안 가서 아이 방 책꽂이가 가득 찼다. 아이는 부모가 치는 박수와 탄성에 따라 이야기책을 읽고 또 읽었다. 세 돌이 되기 전에 아이는 친인척 어른들의 대견스러워하는 눈빛을 한 몸에 모으게 되었다. 이젠 아이는 잠들기 전에 ‘서양 부모의 경우’와 반대로, 아이가 부부에게 책을 펼쳐 놓고 읽어주다가 하품을 하곤 했다.  숫자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부부가 서로 마주 보았다. 칭찬은 하품을 하며 제 침대에 누우려던 아이를 도로 일으켜 앉히곤 했다. 아이는 얼마 안 되어 손가락을 꼽아 셈도 할 줄 알게 되었다. 물론  졸린 아이는 자기 전에 어제 부부에게 읽어주던 책을 꺼내 이어 읽어주다가 잠들곤 했다. 


  아이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서점으로 이끌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지만 박물관을 열 번도 넘게 들락거렸다. 동물원에도 들렀지만 과학관으로도 발걸음이 잦았다. 부부의 칭찬은 아이를 쉬 멈추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눈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부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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