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27
: 귀찮음, 귀찮아서 살고 싶지 않다.
«귀찮아서 살고 싶지 않다.»
«귀찮음»은 진실로 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될 수 있다. 귀찮음은 말 그대로 ‘귀하지 않음’을 뜻한다. 일하기가 귀찮을 수도, 말하기가 귀찮을 수도, 밥 먹기가 귀찮을 수도, 어떤 사람이 귀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살고 싶지 않음’이 뜻하는 바와 가장 가까운 것은 귀찮은 어떤 것도 특정할 수 없을 때, 공허함 그 자체가 귀찮을 때다.
의미도 행동도 느낌도 없는 그 텅 빈 감옥에 대한 귀찮음. 이 느낌은 어떤 느낌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므로 «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 말할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배운 어떤 의미도 붙잡지 못하기 때문에 « 아무 의미도 없다 ». « 무감각 »과 « 무의미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 없는 무거움과 한 없는 가벼움의 역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제나 « 어떤 » 느낌을 그리고 « 어떤 » 의미를 찾아 떠난다.
나는 « 어떤 » 의미를 붙잡을 때면 동시에 불안해졌다. 그리고 다시 무 감각과 무 의미로 떨어졌다. 그곳에는 나의 삶의 « 의미 »가 없다. 그곳, 혹은 « 아토포스 atopos », « 비-장소 »에 의미가 아닌 «삶»이 있다. 내가 귀하지 않다 여긴 것은 삶 그 자체다.
그러나 삶이 귀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 죽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삶의 끝이 무엇인지 모른다. 타인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 타인의 죽음 »은 오히려 « 나의 죽음 »과 가장 먼 의미의 지점이다.
« 타인의 죽음 »이 나에게 « 어떤 »의미를 갖는 « 타인 »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 나의 죽음 »은 의미하는 모든 것들의 사라짐을 넘어서, 달리말하자면 « 타인으로서의 나 »를 넘어서 « 무한한 무의미 », « 영원한 무감각 »의 사라짐을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기를 바랄 수 있다면 « 타인으로서의 내 »가 죽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의미 너머의 삶, 역설자체는 내가 가리킬 수도 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나와 붙어있다.
그러므로 내가 온전히 살고 싶지 않음을 느끼는 것은 « 나의 죽음 »을 바라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나는 이 « 무의미 »와 « 무감각 »에서 삶을 오롯이 « 느낀다 ». 문제는 삶의 오롯한 느낌을 느끼는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오롯함을 귀찮게, 귀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공허한 고통이 있다. 과제는 다시 삶이 아닌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닌, 오롯한 삶을 어떻게 긍정하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