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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May 19. 2024

일상을 여행처럼

단순한 밴쿠버 생활, 특별하게 빛나는 순간들

  너무나 익숙한 말인 '일상을 여행처럼'이 한 글자마다 마음에 와닿는 요즈음이다. 어느덧 1년 11개월이나 살아 일상이 된 밴쿠버에서의 생활이 마치 여행 같이 새롭고 즐겁다. 봄이 깊어져 키 큰 나무들이 어느새 연두빛 잎으로 반짝이고 흐린날보다 맑은 날이 더 많아져 하늘은 푸르게 빛난다. 좋아진 날씨에 새롭게 하는 것은 별로 없다. 한참 누워 지내던 임신 초중기가 지나가고 활동을 시작했을 때 내 몸은 지난 20개월 동안 운동으로 쌓아 놓은 근육을 모두 잃었다. 근육이 들어찬 건강한 몸을 느낀건 인생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다 사라지다니! 몸이란 참 잘 변한다. 약해진 몸으로 6월에 귀국을 위해 공항에라도 가려면 체력 회복이 무조건이라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몸이 다 굳어 처음 걸을 땐 허리도, 골반도 너무 아프고 숨이 차 20분도 채 걷지 못했다. 그래서 밴쿠버 이곳 저곳을 놀러다니지는 못하고,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인 강아지 해변(스패니쉬 뱅크 비치)까지 차를 타고 가서 느리게 걸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걸어가 강아지들이 마음껏 바다에 첨벙 첨벙 뛰노는 모습을 구경하던 그곳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초록 버드나무와 잔디, 너른 하늘과 바다. 행복한 표정의 커다란 개들. 나의 일상이던 이 곳에 간만에 오니 너무나 특별한 풍경이었고, 심지어 바닷가의 통나무에 가만히 앉아 노을 진 하늘에 해가 넘어가는 것을 감상할 수 있는 일몰 명소였다.


  또 어느 날에는 집 근처 해변 공원으로 바베큐를 하러 나갔다. 그릴에 구운 캐나다 소고기의 맛은 순수한 행복의 맛이다. 친정 식구들과 시부모님이 밴쿠버로 놀러 오셨을 때도 일부러 시간을 빼 바베큐를 하러 나갔었다. 다들 이렇게 맛있는 소고기는 처음이라며 신나게 먹었었다. 반 년만에 청량한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이 구워준 두꺼운 립아이와 안심은 그저 행복이었다. 입덧으로 고기를 먹지 못했는데 이렇게 맛있는걸 다시 먹을 수 있다니 그저 기뻤다. 즐거운 바베큐 파티를 끝내고 캠핑 의자에 앉아 자전거 타고 달리기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다보니 이 곳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오래 오래 그리워할 미래의 내가 선명했다.


  또 어느 일요일에는 파머스 마켓(농산물 직거래 시장)에 갔다. 5월부터 10월까지 밴쿠버의 이곳저곳에서는 주말마다 파머스 마켓이 열린다. 장바구니를 챙겨들고 주말마다 그곳에 가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사고, 가끔은 빵과 커피를 사먹는 일상을 좋아했는데 간만에 오니 활기차고 명랑한 분위기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사람들이 코랄 작약 꽃다발을 들고 다니는게 아닌가. 그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고,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남편은 부케 꽃인 코랄색 작약 꽃다발을 선물해주었다. 코랄 작약은 구하기가 쉽지 않아 매년 단골 꽃집에 미리부터 예약해서 준비했다고 했는데 그 날은 작약 농장에서 코랄색 작약을 잔뜩 가지고 마켓에 왔다. 우리는 이게 무슨 행운이냐며 행복한 기분으로 작약 한 단을 샀다. 동글 동글 예쁘게 피어나는 작약을 안고 마켓을 걸어다니는 내내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제 밴쿠버의 파머스 마켓에 올 수 있는 날이 네 번도 안되니까 평소에 궁금하던 모렐 버섯도 사고, 남편이 좋아하는 생면도 사고, 칠리 스프도 사먹었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 활동하면 지쳐서 내내 쉬어야 하지만, 파머스 마켓에서의 두 시간은 낯선 도시에서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처럼 새롭게 즐거웠다.


  최고로 특별한 날은 지난 금요일이었다. 20년 만의 태양 폭풍에 전 세계 곳곳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뉴스를 봤다. 밴쿠버는 오로라를 보기 어려운 도시이다. 그래서 옐로우나이프나 화이트호스로 비행기를 타고 가 영하 20도보다 추운 밤 오로라 뜨기를 기다리는 여행을 간다. 나도 작년에 4박 5일짜리 화이트호스 여행을 가서 영하 30도의 추위에 하룻밤 오로라를 만났다. 시간과 돈을 들여 춥고 먼 그 곳에 가서도 오로라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하루라도 하늘을 뒤덮은 오로라를 봤다니, 정말이지 꿈만 같았던 날이었다. 그런데 밴쿠버에서 오로라를 볼 수도 있다니. 별 기대 없이 하루를 보내다 밤 11시쯤, 너무 너무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그냥 한 번 집 앞에 나갔다. 세상에!!! 온통 불빛으로 밝은 집 앞의 머리 위에서도 구름 같은 오로라가 펼쳐진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얼른 기숙사 단톡방에 지금 집 앞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소식을 전하고, 동기들 단톡방에도 소식을 전했다. 이런 행운은 함께 누려야 하지 않나! 그러자 이웃이 지금 해변에서 바라보는 오로라 풍경 사진을 보내왔다. 그 해변은 내가 맨날 산책하고 소고기 구워 먹는 강아지가 뛰어노는 해변이었다. 당장 차를 차고 5분 거리의 그 곳으로 향했는데 밴쿠버에서 본 적 없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래도 운 좋게 주차를 할 수 있었고, 챙겨간 돗자리를 펼쳐 앉아 밤 12시가 넘도록 달 밝고 별 밝은 너른 하늘을 초록으로,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오로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일상이 된 이 해변에서 남편과, 뱃속의 아가와 편안하게 앉아 오로라를 만나다니. 믿을 수 없는 행운에 그저 행복하고 감사했다.

  

  행복과 감사의 5월을 보내며 생각했다. 원래는 귀국 전에 올랜도의 디즈니 월드나 유럽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밴쿠버에서의 생활은 이제 익숙하니까 마지막으로 신나게 여행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복직하려 했다. 그런데 아기가 찾아오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누워 지내야 했다. 그러다 기본 체력 회복을 위해 조금씩 움직이는 단순한 생활이 왜 이렇게 즐겁고 행복할까? 유럽도 아니고, 디즈니 월드도 아닌데.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모험이나 새로움이 아니라 초록색의 커다란 나무, 나무 아래 앉아서 먹는 음식, 아무 생각 없이 앉아 바라보는 한적한 풍경과 해 지는 하늘빛이기 때문이다. 느릿 느릿한 걸음으로 남편과 하루에 30분에서 한 시간 남짓 걸으면서 좋아하는 것들만 본다. 이렇게 단순한 생활 속에서 우연히 코랄 작약 한 단을 품에 안게 되고, 집 앞에서의 오로라라는 네잎 클로버같은 행운을 만나기도 하고.


  에너지 넘치게 여행을 다니거나, 안 가본 곳에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일상에 평온하게 행복한 이 마음을 오래 오래 기억해야겠다. 근처에서 특별하게 빛나는 순간들을 발견하며 사는 마음가짐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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