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비앤비에 머물 때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호스트가 준비해 놓은 커피를 낯선 도구를 사용해 내려 여행지에서 산 과일이나 빵과 함께 먹는 아침이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과 여행을 다닐 때마다 내가 누리는 혼자의 시간이다. 이번 숙소에는 마을의 커피숍에서 로스팅한 원두와 전동 그라인더가 있어서 간만에 커피콩을 갈아 물씬 퍼지는 커피향을 맡으며 커피를 내릴 수 있었다. 맛있는 커피와 어제 사온 달콤한 나나이모바를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는게 행복했다. 아침의 선곡은, 고요히 행복할 때마다 듣는 Life could be so simple이다.
기분 좋은 아침을 보내고 느즈막히 일어난 남편과 함께 우클루렛의 중심가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쨍하니 맑은데 덥지 않은 날. 여행하기에 완벽한 날이다. 핫도그 가게의 야외 파티오에 앉아 콜라와 핫도그, 샐러드를 시키고 음식을 기다렸다. 등나무 아래의 식탁은 그늘 덕에 시원했고 살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나뭇잎은 아름다웠다. 햇빛의 빛깔이 신혼여행 때를 떠올리게 했다. 정말이지 하와이 같은 날씨다. 가깝게 보이는 바다의 푸른색도 마음에 들고. 이렇게 좋은 풍경 속에서 먹는 핫도그는 최고였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와일드 퍼시픽 트레일의 등대를 보러 갔다. 차에서 내려 조금 걷자 눈 앞에 빨간 지붕의 작은 등대가 나타났다. 소박한 등대 뒤로 펼쳐지는 새파란 바다,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펼쳐진 수평선,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에 속이 시원했다. 밴쿠버 바다는 파도가 잔잔한데 서핑의 성지라는 토피노 바다의 넘실대는 파도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산이나 섬으로 가려지지 않는 바다와 하늘이 좋아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몸이 가뿐하지 않아 느리게 걸었지만 이런 바닷길에서는 느려도 괜찮다. 그렇게 한껏 태평양 바다를 눈에 담고 숙소로 돌아와 조금 쉬었다.
햇빛을 많이 받아서인가 나른해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 토피노 다운타운으로 갈 준비를 했다. 올라가는 길에는 아주 아주 유명한 타코 푸드트럭 '타코피노'에 들르려고 예약 주문도 했다. 팬데믹 기간동안 많은 가게들이 온라인 픽업 주문을 도입해서 여행 다니기 편리하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도착한 타코피노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잘 맞춰와서 도착하자마자 음식을 받을 수 있었고 테이블에 앉아 피쉬타코와 포크 타코를 먹었다. 얼마나 맛있기에 사람들이 한두시간씩 줄 서서 먹는걸까 궁금했는데 생선 튀김이 들어간 피쉬타코가 바삭하고 부드럽게 맛있어서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게 이해가 되었다. 알록달록한 푸드트럭도 생동감 넘치고. 여행지에서 즐겁게 간식을 먹을만 한 곳이다. 기다림 없이 먹었으니 더 좋고!
그렇게 맛있게 타코를 먹고 토피노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임신을 했더니 체력이 없어서 이곳 저곳 구경하거나 많이 걷지 못해서 맛있는 것을 먹고 쉬는 여행을 하고 있는데 이런 여행도 좋구나 싶다. 여유롭고 마음이 편안하다. 야외 파티오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맥주 한 잔 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작은 마을을 걷고 기념품샵에 들어가 어제 봤던 석양을 닮은 그림이 그려진 자석도 하나 샀다. 캐나다에 와서 여행 다니며 기념품으로 자석만 사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아마도 이 자석이 마지막 자석이겠구나 하며 고심해서 골랐다. 2년 동안 캐나다에서 여행하며 지낸 시간이 우리집 냉장고에 붙어서 가끔 떠오르려나. 지치거나 버거울 때, 조금은 기분을 환기해주려나. 돌아갈 날이 머지 않았다 생각하니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저녁은 이효리가 '캐나다 체크인'에서 방문했던 레스토랑 재주(JEJU)에서 먹었다. 이 먼 땅에 한국인이 한식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니. 어디서든 자기 삶을 일구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힘이 된다. 모던하게 꾸며진 레스토랑에서 정말 오랫만에 매콤한 순두부찌개와 갈비, 섬세하게 요리한 가지 튀김을 먹었다. 한식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던 우리는 캐나다에 와서 결국 우리 몸이 원하는 것은 한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며칠만에 먹는 한식은 그저 감탄스러웠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또 다시 감동적일 일몰을 보러 해변으로 향했다. 오늘은 고요했던 어제의 일몰보다 조금 더 북적이는 곳에서 일몰을 보고싶어 토피노 다운타운 근처에 있는 체스터맨 비치로 향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던 롱비치와는 달리 체스터맨 비치엔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아직 날이 춥지만 서핑을 하는 사람도 몇몇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이렇게 너른 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며 물 위에 점점이 떠있는 사람들의 열정이 신기했다. 좋아하는 것을 맘껏 좋아하는 삶, 파도를 타며 행복할 그 사람들의 마음이 상상되었다.
점점 내려오는 태양이 바다와 모래 위에 길게 빛을 뿌리고, 우리는 또 모래 위에 우리의 이름을 새겼다. 아가의 태명도 함께. 아가가 뱃속에 있는 덕에 조금 움직이고 오래 쉬어야 하지만, 이런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아름다운 일몰에 남편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과 10년을 함께 했는데 이제 곧 둘이 아니라 셋이 된다는게 마음을 일렁였다. 서로 너무 다른 우리가 만나 닮아가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고유함을 지켜가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겹쳐진 우리의 삶에 사랑하는 존재가 나타난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기대가 된다. 해가 내려와 하늘 빛을 바꾸는 바다를 오래 오래 바라보며 앞 날을 알 수 없는 삶에서 이런 좋은 순간들을 문득 문득 누리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해가 지고도 하늘 빛은 온화하게 물든다. 나는 일몰 전보다 일몰 후 한 시간여동안 아스라히 변하는 하늘색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해변에 피크닉매트를 깔고 누워 어두워지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흘러간 하루, 캐나다에서의 마지막 여행으로 일몰 후 이 하늘빛이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여행이 끝나고는 출국했을 때 처럼 각종 일을 처리하고 짐을 정리하며 바쁘고 현실적인 날들을 보냈다. 산다는 것은 주로 전화와 서류로, 이메일로 많은 것을 처리하고 머물 곳을 마련하고 정리하는 일들로 채워진다. 그저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처음으로 해외에서 오래 살아본 것이었는데 출국할 때나 귀국할 때나 복잡하고 정신 없는 것은 같다. 그렇지만 2년 동안 이곳에서 여행하고 느리게 머무르며 지낸 시간이 몸과 마음에 남았다. 토피노에서의 느린 여행, 오래 오래 일몰과 바다를 바라봤던 시간을 자주 떠올리면서 출국할 때와는 달리 안정적인 마음으로 귀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에서의 삶을 기대해본다. 정신 없는 생활이 정리되고 나면, 또 좋은 순간들을 만들어야지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