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더라도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로 흘러가다 보면 흔들림도 결국에는 별것이 아닌 게 된다. 단지 원칙을 지키면서 흘러가면 된다. 뇌동하지 않으면 지킬 수 있고, 추격하지 않으면 여지는 충분하기에 끝나지 않을 문제의 근원이 되는 마음 청소에 정성을 다하면서 파동을 그려가는 최선을 주고받아야 한다. 맞지 않더라도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틀렸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시장은 지극히 확률적이고 투자자는 지극히 감정적이지만, 멈추지 않고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 등락하면서 가면 된다.
투자자에게 있어 원칙으로 정한 선은 각자의 마음에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데이트레이딩에서는 적어도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을 관조하면서 파동을 그려야 한다. ① 우연과 우연이 그리고 또 다른 우연과 만나고, 겹치고, 점철되면서 ② 고점과 저점이 또 다른 고점과 저점과 만나 수렴과 발산을 거듭하면서 ③ 선과 선이 또 다른 선과 만나 교차하면서 불운이 되기도 하고 행운이 되기도 한다. 우연이 만들어가는 불운과 행운의 횟수는 어찌할 수 없더라도 불운은 짧게 끝내고, 행운은 길게 가져가는 건 실력의 영역이다. 흔들리더라도 원칙으로 관점을 묶어두고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로 흘러가다 보면 흔들림도 결국에는 별것이 아닌 게 된다. 단지 원칙을 지키면서 흘러가면 된다.
확률적으로 맞고 틀리고는 한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기에 작은 것들을 굳이 실수라고 부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음 수가 언제든지 틀릴 수 있으므로 원칙으로 정한 동그라미를 벗어난 뇌동이 아니라면 명백한 실수는 추격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과 이격이 발생하게 되면 선택지는 단순하다. 보유한 포지션을 손실·이익 처리하거나 보내는 것이다. 등락의 관점에서는 추격이란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다. 추격하다 세간살이마저 털리기 일쑤다. 유행가 가사를 조금 바꾸어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추격은 하지 말아요. 어차피 돌고 도는 거니까 미련은 두지 말아요.’ 수천 번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일반적으로 50% 확률의 기차가 이미 출발했다면 다음 기차의 확률은 25%, (이것이 추격 확률을 20%로 보는 간단한 근거다) 그 방향의 확률이 80%라고 치더라도 이미 이격이 발생한 다음 정거장에서의 확률은 40%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추격 확률은 절대 50%를 넘을 수 없는 간단한 근거다) 추격에 관한 이야기다. 파동을 그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평균 진폭을 넘어서는 추세의 진행 확률은 20% 아래라는 것을. 이격이 평균 진폭에 닿았을 때의 추격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아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킥복싱에서 잘못 들어갔다가 스텝이 엉켰을 때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더 들어가 니킥(knee kick) 맞고 꼬꾸라지는 것처럼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는 게 추격이다. 추격하지 않으면 좀 빠져나올 수 있는 자유(여지)는 그만큼 충분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속에 ‘내던져진’ 형태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쓸 만한 것은 주어진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에 쥐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중략) 청소는 끝없는 작업입니다. 습격해 올 무질서를 일시적으로 돌려놓는 일밖에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청소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우주로 퍼지는 무질서에 대항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질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 우치다 타츠루>
파동의 마디를 꺾다가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잘못 꺾기도 하고, 비탈길에서 넘어지기도 하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지속 가능성은 조금씩 높아지게 된다. 투자자는 방 안을 청소하듯이 너무나도 자주 일순간의 기분에서 태어나는 터무니없는 확신을 쓸어내면서 내면의 질서를 형성해 갈 수밖에 없다. 투자자가 세워진 원칙을 지켜나가는 과정은 인간의 진화론적 한계로 인해 꿈틀거리는 욕구를 쓸어 담아내는 청소와도 같다. 마음 청소는 끝까지 끝나지 않을 작업이다.
우리는 모두 ‘시스템’이라 일컫는 견고한 벽 앞에 서 있는 약한 알입니다. 아무리 봐도 이길 구석은 없습니다. 벽은 말할 수 없이 높고 강고하고 차갑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승리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과 타자의 목숨에 깃은 완전한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믿음, 생명과 생명을 이어줄 때 느끼는 따뜻함에 대한 믿음을 통해 찾아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높은 산에서부터 계곡을 이루면서 바다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훤히 뚫린 산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굽이치는 강물처럼 파동은 (투자자의 심리를 이미 꿰뚫어 빈틈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고점과 저점에서 붙이고, 갈 자리에서는 떨 주면서) 그렇게 등락한다. 투자자는 끝날 때까지 시장이란 견고한 벽 앞에 서 있는 약한 알이기에 그럼에도 파동을 그려가는 최선으로 주고받아야 한다.
머리는 ‘의미’밖에 수신할 수 없지만, 신체는 ‘의미가 되기 이전’의 것도 수신할 수 있습니다. 머리는 ‘시그널’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 신체는 ‘시그널이 되기 이전의 소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중략) ‘죽음’에 대한 감각이 ‘이웃집 마실’ 같아야 한다는 점이 무도에서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것은 필사적으로 무도를 연습하고 담력을 키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집중적으로 탐구한 인간은 무도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그 행동 방식에 숙련되어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느끼고 반응하는 게 감각이다. 어둠을 물리쳐서 해가 뜬다고 표현하는 게 터무니없는 확신이자 자만심이고 이기심이다. 해는 뜨기에 어둠은 물러가는 세상사 이치를 깨치고 이치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게 투자자 내면의 성장이다. 지속 가능성이 담보되지 않는 수익은 아무것도 아니며, (자르고 챙기면서) 물이 흐르듯이 마디를 취해야만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 지속 가능성은 지겨운 복기와 포기할 줄 모르는 반복 과정에서 굳은살이 밴 감각이 담보한다.
시장은 지극히 확률적인 데 반해 투자자는 지극히 감정적이다. 그 간격이 너무 크기에 손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점이다. ‘low buy and high sell’ 싸게 사고, 비싸게 팔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cut loss short, let profit run’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가져가면서 대응할 줄 알아야 한다. 입문서에 나오듯이 투자는 기다림의 미학이자 대응의 예술로 언제나 귀결된다. 단순하게 싸게 사기 위해서 기다릴 줄 알고, 잃지 않기 위해서 손실을 짧게 자르는 게 전부다. 투자 미학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는 돈이 되지 않는 필연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대부분이 견디지 못한 채 돈을 흘리고 다니는 게 시장이기에 그 지독함을 견딘 극히 소수가 인적이 드문 마치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도시의 길가에 낙엽처럼 뒹구는 돈을 줍게 되는 곳이 시장이다.
수익보다 더 중요한 건 잃지 않는 것이다. 시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rule 1 – never lose money, rule 2 – never forget rule 1.’이라고 했던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된다. 50%를 잃게 되면 100%를 만회해야 하므로 그만큼 높은 수익률로 당장 큰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잃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잃지 않고 시장에 머물러야만, 그렇게 최소한 잃지 않는 투자를 반복할 수 있어야만 시장이 말해주는 지혜(이것을 경험적 통찰이라 표현한다)를 체득하게 된다. 지식은 머리로 기억하면 되지만, 지혜는 행동해야만 경험적으로 얻어지게 된다. 파산하지만 않으면 시장에서의 기회는 경험적 통찰의 시간과 비례하게 된다.
시장은 ‘심리의 합’이라고 할까? 혹은 ‘탐욕의 합’ ‘가진 자의 합(흔히 말하는 큰돈)’이라고 할까?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손은 무엇일까? 아마도 경험적 통찰로 돈을 가져가는 그 몇 퍼센트가 아닐까? 확실한 건 인간의 뇌 구조에 비추어 극소수가 거의 전부를 가져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것은 ‘부익부 빈익빈’ ‘돈이 돈을 번다’라는 자본주의 속성과도 일치한다. 점점 고도화되는 자본주의에서 절망의 계곡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는 이의 사다리가 ‘남들이 가지 않는 길’ or ‘다수가 갈 수 없는 길’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같다. 투자자는 원칙으로 정한 자리에서 등락하면 그뿐이다.
“제 생각에 이 일은 분명 이치에 맞지 않지만, 사람이 살면서 이치에 맞는 일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럴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지 않고 머릿속 저울로 현상의 무게를 달다 보면 왼쪽 이마 안에서 끊임없이 원을 그리는 두통이 찾아오거든요.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혼돈을 인정하고 그냥 무언가를 그냥 하다 보면 두통 같은 건 찾아오지 않거든요.”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노년의 시간은 수평으로 흐르는 급류가 아니라 기억이 술술 빠져나가는 밑 빠진 물탱크라고 느꼈다. 그의 창의력은 고갈되고 있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금씩 줄어드는 생의 모래시계. 끝나는 날까지 변하지 못한다 해도 가야 한다. 자꾸만 뻣뻣해지는 어깨 근육. 다하는 날까지 채우지 못하여도 그냥 가야 함을 알고 있다. 언제나 먹이를 찾아 밤길을 헤매는 하이에나 무리에서 나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곤 한다. 신호를 기다릴 줄 알고 소음에 놀라지 않는 한 마리 사자가 되고 싶지만, 희망 저 너머에서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사자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어릴 적에 어떤 아이가 그에게 돌멩이로 새를 맞힐 때 사용하는 마술적인 주문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맞는다. 맞는다. 맞지 않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오롯이 확률로만 설명되는 시장에서의 투자자 관점에서 이 표현을 인용하면 이렇지 않을까? “맞는다. 맞는다. 맞지 않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내 잘못은 틀렸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