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렌다. 이제는 나갈 준비가 되었다.
"You need some help?"
돌아오는 답변은 oh, no no. No thanks
브런치 북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by 시몬디
노래와 함께 읽어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lVISeGcRvUg&t=28s
이것이 바르셀로나의 첫인상이다.
짐이 많아서 손이 모자란 와중에도 쉽사리 누굴 믿기 힘든 분위기랄까.
정신없을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고, 각 국에서 온 여행객이 많아 늘 들떠있는 듯 하지만, 마냥 긴장을 풀 수 없는 분위기. 맘 편히 호의를 베풀기에도 약간은 조심스러운 긴장감. 그날은 월드컵 개막식이 있는 날이어서 그런지 바르셀로나 거리가 더 혼잡한 듯하다.
그렇다.
나는 연말 2022 월드컵과 크리스마스 시즌이 맞물리는 시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왔다.
낭만의 끝판왕인 유럽의 크리스마스와 축구 강국인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월드컵 시즌을 보낸다는 것. 심지어 한국 vs포르투갈의 경기를 포르투갈 현지에서 본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순간들 일지 어렴풋한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한 번에 다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 짐들을 챙기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이름 모를 낯선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건만 그녀는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짐을 챙겨 떠났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치안을 약간 실감한 채로 머쓱하게 숙소 1층 낡은 대문을 열었다.
낡은 1층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타일이다. 한국인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유럽의 빈티지 타일을 여기서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다. 역시 사람은 자기에게 익숙지 않은 새로운 것을 동경하나보다.
이 오래된 호스텔에는 한 가지 더 신기한 게 있었는데 바로 엘리베이터다.
"우와 타이타닉에 나온 엘리베이터다"
언제 이 건물이 지어졌는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한국에 살면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빈티지하고 유니크한 엘리베이터가 우리의 첫 관문.
"이거 뭐.. 이렇게 수동으로 문을 열고 타는 건가? 작동은 잘되나?"
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약해 보이는 아가일 모양의 쇠창살 같은 것을 직접 드르륵 열고 또 한 번 드르륵 닫은 뒤 층수를 눌렀다. 딱 두 명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매우 좁은 공간인데 겉보기와 다르게 작동은 잘되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유럽에는 이런 엘리베이터가 꽤나 흔한 것 같다. 보자마자 나처럼 타이타닉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꽤나 많은 것 같고. 사실 여행 중 몇 번은 이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계단으로 다니기도 했다.
도착한 숙소는 한창 청소 중인지 처음 맡아보는 이국적인 향이 난다.
뭔가 인도향 같으면서도 진하고 시원한듯한. 아마 스페인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지 않을까 싶다. 이 향을 설명하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나처럼 정체 모를 그 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시 향은 그 자체로 또렷한 기억을 떠올려내는 힘이 있다.
스페인 여행 내내 곳곳에서 이 냄새가 났는데 설명이 참 힘들다. 인도향 같은 그런 이국적인 향. 스페인의 그라나다라는 지역이 과거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스페인 곳곳에는 오리엔탈 무드가 가득한 소품과 향을 파는 상점을 자주 볼 수 있다.
신기하다. 서양에서 마주하는 동양의 향기란
드디어 숙소 방을 배정받고 들어왔다.
하루 가까이 떠돌이 신세처럼 돌아다니다 숙소에 들어오니 모든 긴장이 풀리는듯하다. 웃긴 건 숙소 체크인까지 했는데도 아직도 내가 바라던 그 여행지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거다.
'도착했다! 근데 진짜 도착한 건가?'
딱 이 느낌.
'진짜 조금만 걸어 나가면 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있다고?'
여행 출발 전 바쁘게 일정을 계획하고, 설레어하고, 상상했던 그 여행이 막상 도착을 하면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심지어는 여행 도중에 약간은 귀찮은 순간도 있고.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쌓인 피곤함을 씻어내고 앞으로의 여행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나는 머리가 복잡해서 환기가 필요하거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무언가 돌입할 때 샤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걱정이나 피로, 많은 복잡한 감정 덩어리들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큰 위로가 된다.
샤워를 마친 후 한결 좋아진 기분으로 히죽거리며 한국에서부터 고이 가져온 컵라면을 꺼냈다. 단 6개만 챙겨 온 너구리 컵라면. 우리가 가져온 한식의 전부이다.
위치만 보고 잡은 급히 잡은 이 호스텔에는 뭐가 없어서 그저 컵라면에 찬물을 붓고 전자레인지로 컵라면을 수 분 동안 데워먹었다. 스탭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신 부탁하느라 조금은 싱겁고, 덜 익은 작은 컵라면이지만
그 자체로 너무 반가운 맛이다. 국물 한입 한입이 소중하다.
“아쉬워..”
한국에서는 슈퍼와 편의점에 널린 게 이 컵라면인데 벌써부터 한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한국 가면 컵라면이랑 삼각김밥 왕창 먹을 테다. 해외 가면 햇반이랑 삼각김밥이 왜 그렇게 먹고 싶은지
이제 무사히 숙소도 잘 도착했고, 따뜻한 물로 개운히 씻고, 따뜻한 컵라면도 먹고. 이 행복한 순간에 빠질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왔다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태블릿을 꺼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비긴어게인 2의 포르투갈 포르투 야간 버스킹 편을 재생했다.
2020년 코로나 발생 직전 우연히 보게 된 비긴어게인 2는 생각지도 못한 큰 감동을 주었다. 로맨틱한 야경을 자랑하는 포르투 동루이스 강변에서의 버스킹은 황홀 그 자체였다. 유럽여행이라곤 별 생각도 없었는데 당장 비행기표를 끊어 떠나고 싶을 정도로 낭만적인 모습이었다.
일렁이는 강변과, 반짝이며 아치형 곡선을 그리는 다리를 배경으로 늘어선 노란 불빛의 조명들. 그리고 김윤아 씨가 fly to the moon 첫 소절을 부르며 버스킹이 시작된 순간 나는 포르투에 빠져버렸다.
당장 떠나고 싶었지만 코로나가 확산되는 바람에 내 여행은 무기한 연장되었고 팬데믹이라는 그늘아래 포르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바람을. 꿈조차 잊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2년 후 지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와서 그렇게 꿈꾸며 봤던 그 화면을 보고 있으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내가 곧 저 장면을 마주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납작하고 작은 스크린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데 그렇게 기대하던 포르투의 동루이스 야경이 눈 가득히 꽉 차는 순간은 얼마나 감동일지. 벌써 뭉클해진다
낯선 첫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한국에서 사 온 컵라면을 먹고, 이 여행을 오게 된 이유와 설렘을 되새기는 건 단순히 기분 좋음 이상의 의미가 있다. 타지이지만 내게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 여행지에 녹아들기 위함이다.
다양한 문화와 예술, 건축, 역사가 공존하는 열정의 나라 스페인. 오늘 2022 월드컵 개막전을 기다리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거리는 이미 떠들썩하다.
설렌다. 빨리 이 낯선 타국을 경험하고 싶다.
이제는 나갈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