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걸려도 괜찮아 어차피 목적지로 갈 테니까.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우리는 구글맵을 켜서 목적지인 바르셀로네타 해변을 찍고는, "우와'를 남발하며 그냥 걸었다.
조금 벗어나도, 다른 길로 가버려도, 조금 더 걸려도 괜찮아 어차피 목적지로 갈 테니까.
브런치 북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by 시몬디
함께 들어보세요. 그날의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eRMf9p1dtUY&t=19s
17시간이 걸릴 정도로 멀리서 날아온 내게는 여기 모든 게 신기하다. 오래되어 낡아 보이는 건물도, 평범한 돌바닥도, 내 주위에 온통 가득한 외국인들도. 어딜 둘러봐도 '이곳은 유럽'. 행복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번 여행을 위해 열심히 준비해 온 일정표가 지금 여행의 첫 시작을 앞두고 설레는 우리에겐 무의미하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만끽하고 싶다. 계획대로만 하려다 보면 오히려 그 순간의 행복을 놓칠 수도 있다. 모든 건 내가 행복하기 위함이니까.
난 오늘 밤에 돌아가 편히 쉴 숙소도 있고, 꼭 해보고 싶은 투어도 신청해 놨고.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편도 있다. 그럼 된 거지. 기대치 못한 즐거움과 행복은 모든 게 정해진 계획에서 나오는 게 아닐 테니까.
구글 리뷰를 보고 급히 들어간 음식점은 시골 할머니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다.
마치 내가 어릴 적 자주 가던 캔모아를 떠올리게 하는 프로방스 인테리어와 친절한 서버들. 벽에 매달린 TV에서는 2022 월드컵 경기가 한창이고, 사람들도 묘하게 들떠있는 듯하다.
티본스테이크와 그라탕, 그리고 과일이 듬뿍 들어간 샹그리아 와인. 우리의 첫 유럽여행, 첫날 첫 식사다.
주변을 경계할 필요도, 길을 헤맬 필요도 없이 아늑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참 좋다 이번 여행. 눈만 마주쳐도 싱글벙글 웃음이 나고 서로를 찍어 주기 바쁘다. 좋다. 따뜻하고 짭짤한 음식이 식기 전까진.
아, 깜빡했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식어버린 음식은 난생처음 맛보는 강렬한 짠맛이다.
아까 맛있게 먹은 음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스페인의 요리는 한국인에게는 간이 매우 센 편이다. 여행 내내 내 얼굴부터 전신을 붓게 만들 정도의 강력한 짠맛. 여행을 준비하면서 '뽀꼬쌀(소금 빼주세요)'을 그렇게도 외워왔는데 첫 주문이라 깜빡해버렸다.
까짓 거 뭐 어때. 짠 음식을 먹으면서도 재밌다고 까르르.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이것도 추억이라며 우리는 또 한 번 투명한 샹그리아 잔을 마주치며 첫 여행을 기념한다.
“짠 우리의 첫 유럽 여행을 위하여!”
사실 오늘 여행은 계획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다.
비바람이 불고 날이 흐려서 그렇게 가고 싶었던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결국 가지 못했다. 보케리아 로컬 시장도, 자전거도 타지 못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우리 마음 가는 대로 즐기면 그걸로 된 거지. 작은 TV에서 나오는 시끌벅적한 축구 경기도,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커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 짓는 이곳 타국의 친절한 서버들도. 어릴 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포근한 분위기의 이 음식점도. 많이 그리울 거야 벌써부터.
밤이 되니 거리는 축구 경기를 기다리는 외국인들로 시끌벅적하다. 온거리가 축제 분위기다.
우리는 고딕지구의 밤을 제대로 느껴보려고 야간 투어를 신청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하루종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한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낯선 사람들인데도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의지가 되다니. 따뜻한 음식과 달달한 샹그리아도 마셨고 긴장이 훅 내려간다. 기분 좋은 술기운에 달아오르는 볼만큼 내 기분도 상기되고
이때부터였다. 어두침침한 바르셀로나의 고딕지구가 더 이상 무섭지 않고 낭만적인 거리로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이
우리는 골목을 줄지어 가며 이어폰을 통해 가이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의 이름은 진호.
아까 둘이서 배회할 때만 해도 동양인도 거의 없고, 모든 게 낯설어 위축되어 있었는데 한국인들 여럿이 함께 다니니 오늘 내내 나를 짓누르고 있던 '내가 이곳의 이방인'같은 느낌이 흐릿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낭만적인 이 고딕지구의 분위기가 더 잘 느껴짐은 물론이고. 그들이 누구이건 중요치 않다.
스페인 역사가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고풍스러운 골목을 걸어 다니며, 이어폰으로 이곳의 이야기를 듣는 건 무척 낭만적이다. 마치 심야 라디오를 듣는 것 같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와, 그녀가 중간중간 틀어주는 플레이 리스트까지. 심지어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 그 장소에 내가 와있다니. 여행 덕분에 묘하게 들뜬 사람들의 표정까지. 로맨틱한 꿈을 꾸는 것 같다.
누군가가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가우디와 콜럼버스가 걸었다는 길을 차분히 걷는 고딕 지구의 밤 산책.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경복궁 야간 투어를 하며 사극풍의 노래를 듣는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고딕지구는 해리포터와 해그리드가 지팡이를 사러 이곳 어디 상점에 돌아다닐 것만 같은 동네다. 매력적이다. 때마침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city of stars는 이곳 고딕지구의 청취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달빛은 무척 밝고.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왕의 광장 계단에 걸쳐 앉았다.
500년 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 돌아와 이사벨 왕비를 알현하기 위해 걸어 올라왔다는 이 계단. 실감 나게 설명하는 그녀의 음성을 들으며 눈을 감고 상상에 잠긴다.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이곳과, 이어폰을 통해 듣는 따뜻한 목소리, 광장 위를 드리우는 은은한 달빛은 나를 지금 과거로 되돌려 놓는다. 이곳 바르셀로나가 점점 더 편하게 느껴진다.
오늘 첫 여행을 시작할 때 온통 낯설게만 느껴졌던 바르셀로나가 돌아갈 때는 한결 편하고 낭만적인 도시로 다가온다. 오길 참 잘했다.
"이번 여행 같이 오자고 해줘서 고마워"
얼마나 재밌는 일들이 생길까, 여행을 마치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내일은 바르셀로나의 꽃, 가우디 투어를 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