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만난 그 사람
기차는 다음 목적지, 그라나다를 향해 빠르게 달린다.
됐다. 드디어 다 적었다.
다가간다.
"저 방금 메일 보냈는데 시간 나실 때 읽어보세요"
그는 내게 웃어 보인다.
그리곤 한동안 그를 볼 수 없었다.
브런치 북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by 시몬디
글마다 잘 어울리는 노래를 추천해 드려요.
BGM 아이유- 정거장
https://youtu.be/yxQbv1W7haw?si=H5rEZmnQy2_L0588
그런 사람이 있다.
짧게 스쳐 지나갔지만 잊히지 않는 사람.
아는 게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궁금증을 자아내고 여운이 남는 사람.
이번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May I help you?"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향하는 기차 안.
적막을 깨는 따뜻한 목소리.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꽤 큰 캐리어를 들고 선반 앞에 섰다.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잘 살피는 마음씨 따뜻한 내 동행은 재빨리 일어나 할아버지의 짐을 선반에 올려드렸다.
이게 로버트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이다.
할아버지는 우리와 마주 보고 앉아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느낄 수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와중에 선뜻 할아버지의 짐을 챙겨드린 탓에 우리에게 호의적이란 걸. 기차 안 우리를 둘러싼 경계의 눈빛들 속에서 유일하게 다가온 한 사람. 참 좋았다 그 순간이
로버트 할아버지는 지긋한 연세에도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글을 쓰시는 작가이다. 사는 곳은 영국.영국 신사하면 떠오르는 그 모습.
" 할아버지는 어디로 가세요? 어디에 사세요?"
타인에게 조심스러운 내가 수다쟁이가 되고 싶을 정도로 다가가고 싶은 사람, 로버트. 잠깐 봤지만 그냥 느낌이 좋고 친해지고 싶은 그런 사람. 친해지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지며 스몰톡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게 자연스러운 사람.
30분쯤 얘길 나눴을까, 할아버지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셨고, 명함 하나를 주셨다. 그제서야 원래 예약한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호의에 반응해 앞에 앉으신거였다는 걸 눈치챘다.
받은 명함을 바로 구글에 검색해 보았다. 그러곤 할아버지가 쓴 에세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마약과 도박에 찌들어 살았고 지금은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며 다른 나라에 봉사들 다니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간다는 멋있지만 따뜻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
"역시 멋있는 분이었어.."
저 이 인자하고 인상 좋으신 할아버지께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의 과거 이야기. 그리고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시는 지금 모습.
30분간의 대화, 그리고 그의 에세이를 읽은 것 만으로 우리는 급격하게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국적이 다르건, 40살이나 나이차이가 나건 중요치 않았다.
짧은 만남, 긴 여운.
로버트에 대한 고마움과 감동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급하게 핸드폰 메모장을 켜 이리저리 적느라 문법도 엉망이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행여나 할아버지가 그사이에 내려버리시진 않을까. 떠오르는 말들을 쉴 틈 없이 적어 내려갔다.
드디어 메일 전송 완료.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그에게 다가간다.
"로버트, 아까 받은 명함에 있던 이메일 주소로 편지 보냈는데 시간 나실 때 읽어보세요"
눈이 동그레진 로버트 할아버지는 이내 나에게 웃어보인다. 참 따뜻한 사람
괜스레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한동안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디 가셨지? 내리 신건가..'
'언제쯤 돌아오시나'
뜻깊은 인연을 만났지만, 계속 달려가고 있는 이 기차 안에서 인사도 못한채 허무하게 헤어질까 봐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쓴 편지 너무 감동이야.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었어. 고마워"
내가 기특하다는 듯 웃어 보이는 로버트.
그러고는 내 옆에 앉은 동행에게 이런 뜻밖의 말을 하신다.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녀를 놓치지 마"
그러고는 아직도 여전히 빨개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 양볼을 이쁘다는 듯이 쓰다듬으신다.
오늘 마주한 시간 내내 매너 있고 젠틀하던 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내 양볼을 쓰다듬은 건 꽤나 큰 친밀감 표현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어릴 적 내 볼을 쓰다듬는 것 같은 크나큰 사랑이 느껴졌다. 뭉클해졌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리셨다. 자기 책이 나오면 내 메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과, 기념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남기고.
할아버지가 기차에서 떠난 뒤에도 나는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잠깐 찰나의 인연에서 이렇게까지 뜻깊은 대화와 영감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나는 할아버지와, 그의 인생에 대해 마땅한 존경을 표했지만 그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 한 번 더 나를 한번 더 감동시켰다.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가면을 쓴다.
제 아무리 솔직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좋은 사람인척
있어 보이는 척
똑똑한 척
점잖은 척 또는 활발한 척
겉모습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잘 보이려 애쓴다.
그렇기에 내 꾸며지지 않은 모습, 잘 보이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자체로 특별한 관계이다.
한동안은 사람이 싫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만 하다 번아웃이 와서 퇴사를 했으니. 나를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사람, 괜스레 내 겉모습에 대해 관심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말들.
이번 여행에서 로버트 할아버지를 만났던 그날은 무방비 상태였다.
조금도 다듬어지지 않은 편안한 차림에 편안한 모습. 오늘 로버트와 얘기를 하는 동안 내가 몇 살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좋은 회사를 다니는지,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잘 보일 필요도 아무런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떠드는 손녀처럼 그저 편하게, 나도 억누르고 있었던 내 순수한 모습을 단시간에 꺼내보였어서 그럴까.
나도 모르게 감정이 툭하고 건드러졌다.
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내 본심과는 다르게 서툰 표현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후회도 많이 하곤 했다.
살다가 지칠 때, 나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을 느낄 때.
'그냥 너는 그자체로 이미 좋은 사람'이라고 웃어 보이던 따뜻한 손길의 로버트 할아버지가 참 보고 싶다.
우리가 정확히 그날 그 시간에 그 기차를 탄 것도.
여러 자리 중 그 칸, 중에서도 4인 좌석을 배정받은 것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내 동행이 친절을 베푼 것.
로버트가 앉을 수 있도록 마침 우리 앞자리가 한참 비어있었던 것도.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모든 게.
건강하세요 보고 싶어요 로버트
안녕하세요 로버트.
저예요 맞은편에 앉아있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받아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어요.
저는 당신만큼 영어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제 멋대로 편지를 쓰고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사실 명함을 받고 나서 바로 구글에 검색해 봤어요. 이후에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추구하는 가치가 뭔지, 관심, 버킷리스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요. 정말 인상 깊었어요.
제가 지금 상황에 왜 이렇게 감동받았는지 이해 못 하실 수도, 이상해보일 수도 있지만, 충분해요 저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저희에게 웃어주셨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해주셨고, 정말 친절히 대해주셨어요. 처음 와보는 유럽여행 내내 긴장을 낮출 수 없었던 우리. 낯선 타국에서 받는 할아버지의 친절이 참 따뜻했어요. 살아온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더욱 감동받았어요.
특히 자신의 과거 경험을 사용해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사회에 되돌려 주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할아버지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치고 있거든요.
저는 사회, 환경, 사람, 자연, 우주, 글쓰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하지만 당신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뭐랄까요. 저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처럼 용기 있는 행동을 한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가까운 사람에게 제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sns에 제 생각을 짧게 쓰거나, 관련 있는 책을 읽는 정도의, 모두 그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쳤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할아버지는 정말 용감하고, 대단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10년 후에는 저도 할아버지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해요.
할아버지의 꿈과 삶을 제가 지지해요.
할아버지와의 만남 덕분에 더욱 행복한 여행이 될 거 같아요.
좋은 추억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건강하세요 로버트!
그라나다로 가는 기차안에서 끝.
그라나다 이야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