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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몬디 Oct 05. 2023

#9 현실로 돌아가기 두려울 정도로 황홀한 순간 있잖아

우리는 그렇게 함께 비눗방울을 만들고, 춤을 추고 노래했다.



"같이 추자"


우리는 함께 비눗방울을 그리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런 경험을 내가 살면서 다시 할 수 있을까?


오늘은 내 인생 최고로 낭만적인 밤이다.


이 밤이 가지 않았으면, 이 여행이 끝이 아니었으면.


현실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질 정도로 나는 황홀한 꿈을 꾸고 있다.


부디 이 여행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브런치 북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by 시몬디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 함께 들어보세요

여름밤의 꿈 - 아이유

https://youtu.be/ltRyHe4fFkU?si=Vbs1uuTgq0TrJrQu





"근데 있잖아, 우리 앞에 서있는 사람 한국인이다?"


우리는 서로 이미 눈치챘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란 셔츠재킷, 짙은 녹색 커버가 씌워진 큰 캐리어. 


그라나다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신호등 대기동안 만난 이 사람.


그는 우리가 이번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중 처음 만난 한국인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는 여러 번 등장할 예정이다.


그때는 몰랐지. 


처음 보는 이 사람과 함께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될 줄은. 


그것도 여기 스페인이 아닌 포르투갈에서.





이름이 뭐예요? 제 이름은 소영입니다.




숯불향이 나는 바비큐와 감자튀김. 


스페인에서 이걸 먹으면서도 칼칼한 된장찌개와, 고슬고슬한 쌀밥, 부드러운 계란찜을 떠올리는 내가 우스워 피식 웃었다. 오며가며 싱글벙글 웃어주는 서버까지 우리의 기분을 황홀하게 만들어준다.


다시 그라나다에 오게 된다면 이 집은 꼭 와야지. 나가기 전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진다.


"근데 '당신 정말 친절해요'는 스페인어로 어떻게 말하지?"


나는 해외여행을 가면 현지어를 최대한 자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툰 한두 마디라도 현지인들과 짧은 교감을 나누면 뜻하지 않은 즐거움이 있다. 그들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 그 여행이 더 좋아지곤 했다. 내가 조금은 서툴지만 반짝이는 눈으로 현지어를 말했을 때,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 좋다. 언어 공부는 제일 사소한 덤이다.


파파고 어플을 켜서 검색해본다.


 '당신 정말 친절해요' 

'이름이 뭐예요?' 

'제 이름은' 

'안녕히 계세요'


여태 썼던 인사말 외에 처음 써보는 표현들이지만 따라 읽고 싶진 않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음성을 놓치지 않으려 귀에 핸드폰 스피커를 대고 계속 발음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됐겠지.'


옷가지를 챙겨 나갈 채비를 하고 서버에게 다가갔다. 혹시나 까먹을 새라 번역된 스페인어가 띄워져 있는 휴대폰 화면을 밝게 켠 채로. 볼일이 다 끝났는데 갑자기 다가가 스몰톡을 하려니 무척이나 부끄럽다.


'아 그냥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갈까... ' 서버에게 다가가는 잠시 3초간의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저, 저기요.."


어리둥절한 서버는 특유의 크고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음.. Eres muy amable (당신 정말 친절해요)"


놀란걸까.


 뜻하지 않은 말을, 그것도 스페인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동양에서 온 손님에게서 이 말을 들은 서버는 놀란듯하더니 금세 눈이 휘어지며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이름이 뭐예요?"

"제 이름은 소영이예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잘 지내요!"


이 짧은 대화를 하는 동안, 그 친절한 서버는 물론, 주위에 서있던 직원들까지 나를 흐뭇하고 뭉클한 눈으로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서비스에 고마워해야 될 건 나인데 그들이 더욱 기뻐하는 걸 보니 더 뭉클해진다. 


이런 게 여행이지. 내 작은 용기로 인해서 오늘 하루 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주는 게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돈이 드는 것도, 내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정말 사소한 칭찬도 당사자에게 베풀었을 때 더 큰 기쁨으로 내게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잠깐의 순간으로 그라나다는 나에게 더욱 따뜻한 도시로 기억될 테니. 


그거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렇게 비눗방울을 만들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맛있는 고기도 먹고 샹그리아도 마셨다.


밤이 되어 노란 조명이 비추는 그라나다는 더 이쁘다.


기분이 한결 더 좋아진 나는 취기를 핑계로 골목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다닌다. 


아, 우리는 오늘밤 꽤나 낭만적인 곳을 갈 예정이다. 노란 불이 일렁이는 알람브라 궁전의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 니콜라스 전망대로 간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스페인 여행 내내 식사 때마다 습관적으로 곁들이게 되는 샹그리아는 나를 좋고도 힘들게 만든다. 와인잔 가득 채운 과일과 쓰지 않고 달달한 술은, 술이 약한 내게도 달콤한 유혹이다. 당장이라도 그냥 주저앉고 싶은 어지러움과 취기를 안은 채로 조금은 힘겹게 헐떡이며 오르막을 오른다.


전망대에 다 와갈 무렵,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언가 홀린 듯이 광장 같은 곳에 조심스레 들어섰다.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기타 치고 노래하는 듀엣, 그 앞에서 대형 비눗방울을 계속해서 그리는 남자.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뽐내는 노래가 아니다. 유명하지 않은 노래,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흥에 취해 나지막이 부르는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전망대로 가던 길에서 벗어난 것도 잊고 그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앉았다.


"한국 사람 맞죠?"


히피펌을 한 듯한 곱슬머리에 큰 안경을 낀 모로코에서 온 여자. 그녀는 특유의 넉살을 뽐내며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 옆으로 붙어 섰다. BTS와 한국 드라마 도깨비를 좋아한다는 그녀. 영화 같은 장면을 배경으로 먼 나라에서 자고 나란 사람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이제 너네도 와서 이거 해봐!"


급기야 비눗방울을 만들던 남자는 우리에게도 만들어보라며 손짓한다. '진짜로? 내가?' 조금은 부끄럽지만 앞으로 나갔다. 


그래 우리끼린데 뭐 어때.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비눗방울을 크게 그리며 뛰어다녔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잘한다며 아기 바라보는 부모 마냥 흐뭇하게 까르르거렸다.



모로코에서 온 Kpop을 좋아하는 여자, 알바니아에서 온 비눗방울을 그리고 자기 멋대로 리듬을 타는 남자,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프랑스에서 온 남자들과 한국에서 온 아직은 조금 쑥스러운 우리. 


우리는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냥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다가, 한 명씩 나와서 큰 비눗방울을 그리고 환호를 해주고, 일어난 김에 노래에 맞춰 박자를 타고 춤을 췄다. 도시에서는 참 보기 힘든 풍경이다.


"같이 추자!"


이 모든 분위기를 즐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녹아들기에는 어색한 나에게 다가와 함께 춤을 추자 하는 그녀. 색다른 이 순간이 너무 좋으면서도 부끄럽기도 하고 믿기질 않는다. 


그래 남들 눈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여긴 스페인이고, 우리뿐이고, 즐거우면 된 거지!




나도 일어나 함께 춤을 췄다. 


달빛과 노란 가로등 조명이 빛나는 그곳에서 각국의 나라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함께 섞여 노는 이 순간이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함께 서서 노래하고 춤추고 비눗방울을 그리고,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즐기는 그 순간이 마치 슬로 모션 같았다. 영화에서 행복한 순간을 묘사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그 장면처럼.


억지로 춤을 추지도, 억지로 신난척하지도, 그들은 자신의 흥을 서슴없이 표현하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내게 전혀 기대하지 않는 그들 덕분에 나도 나를 내던지고 마냥 즐길 수 있었다. 각자가 즐기기에 바쁜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부끄러운 건 나 스스로일 뿐.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하다가 함께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포옹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걷다 우연히 이끌린 곳에서 만난 사람들. 


이런 경험을 내가 살면서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전망대에 도착하기도 전 큰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이다. 


오늘은 내 인생 최고로 낭만적인 밤. 이 밤이 가지 않았으면, 이 여행이 끝이 아니었으면.


현실로 돌아가는 게 두려워질 정도로 황홀한 꿈을 꾸고 있다.


안녕, 잘지내 친구들






눈앞에 펼쳐진 알람브라 궁전의 밤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오른 전망대에는 또 다른 낭만이 일렁이고 있다.


알람브라 궁전을 보기에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노란 불빛을 따라 줄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 그라나다는 정말 따뜻하고 낭만적인 도시다. 


아무리 충전을 해도 바로 배터리 반절이 날아가버리는 구닥다리 아이폰 7로 찍은 이 사진이 전부이지만. 오늘 밤은 모든 게 행복해. 


모든 게 서툴고 긴장해 있었던 바르셀로나와는 달리, 그라나다는 모든 게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전환점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동안 또 한 번 그라나다를 바라봤다. 


우리는 달빛에 어울리는 노래, fly to the moon, city of stars를 들으며 이 낭만적인 도시의 밤을 만끽했다. 잔잔한 노랫소리, 발자국 소리, 읊조리는 우리 말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 고요한 골목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무기력해져 혼자가 좋다던 나는 어느새 이 여행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원하고 있다.


쑥스럽지만 용기내어 스페인어로 처음 건넨 칭찬, 광장에서 함께 비눗방울을 만들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던 모로코, 알바니아,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 내가 이곳에서만큼은 이토록 적극적인 사람이 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17시간을 걸려서 온 타국에서도 이렇게나 잘 지낼 거면서 고작 현관밖을 나서는 건 왜 그리도 두려웠는지.  먼지만큼 작은 내가, 티끌 같은 고민을 하는 동안 세상은 이렇게나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지친 회사생활 스트레스와 무기력에 감춰져 있던 나의 밝고 따뜻한 모습이 조금씩 내비치는 듯하다. 잊고 있었던 내 모습을 조금씩 마주 하고 있다. 


맞아 나도 꿈이 있고 씩씩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서른을 앞둔 지금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에 주눅 들고 지쳤던 나, 이 여행이 내 삶에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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