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IAO Jul 11. 2024

삼각산 봉국사에서 (1)

배산례 씨에게 드리는 글


배산례 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배산례 씨는 바로 나의 외할머니다.




서울 '비원' 앞(엄마가 항상 '비원 앞에 살 때'라는 말을 자주 하셨었다) 부잣집 안주인이었던 외할머니는 가난한 사위인 나의 아버지에게 딸린 네 명의 동생들의 학업까지 다 마치게 해 주신 분이다.

그 이후 언제 이사하신 건지는 모르지만 나의 어릴적 외갓집은 성북구 북악스카이웨이 근처이다.


큰오빠와 작은오빠를 힘들게 낳아 키우던 허약한 체질의 엄마는 셋째가 생기자 낙태를 결심하셨다고 한다. 임신 기간 내내 입덧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고, 아무리 얌전해도 15개월 차이의 형제를 키우는 것 쌍둥이 키우는 것보다 힘든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엄마가 딸을 원하는 아버지의 바람도 저버리고 아기를 지우려 했을 때 간곡히 말린 사람은 외할머니 었고, 외할머니 덕분에 엄마의 뱃속에서 열 달 하고도 3주 만에 사히 내가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외할머니댁에서 보낸 날들이 많았다. 외할머니는 친손주가 셋이나 있지만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인 나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으시고 까탈스러운 비위를 다 맞춰주시며 맛있는 것을 골라 먹이시고 좋은 옷을 사입히시며 금이야 옥이야 키우셨다.


어린 나는 외할머니가 좋으면서도 엄마가 그리운 마음에 늘  엄마는 언제 오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외할머니는 열밤 자고 엄마가 올 거라고 했지만 마는 오지 않았고 나는 날짜를 세다가 포기하곤 했던 기억도 난다.(아마도 10 이상의 숫자를 세지 못하던 나이였을 듯)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외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자주 오셔서 나를 돌봐주셨고 방학이 되면 나는 또 외할머니에게 가서 지내곤 했다.


외할머니는 내가 대학생이 된 후에도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씩 지내고 가시곤 했는데 그때의 나는 왠지 외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을 했고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즐기느라 사실 외할머니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외할머니는 그때도 우리 집에 와계셨는데 이미 연로하신 외할머니는 며칠째 아무것도 드시지도 못하고 누워만 계시다가 엄마에게 짜장면을 시켜달라고 해서 조금 드시고 목욕을 시켜달라고 하시고는 그날밤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셨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절에 다녔던 것인데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절에서 나를 위한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절이 바로 성북구에 있는 봉국사이고 그때 4~6살이었던 내가 보았던 절 입구의 천왕문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최근 나는 나이에 어리지도 않게 나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과정 중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외할머니가 생각났고 왠지 봉국사를 가면 그리운 외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왠지 르게 봉국사에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다 다시 돌아서기를 두 번.

그러다 오늘 아침, 얼마 전 외할머니와 봉국사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가 오늘의 미션이니 제발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어줘서 용기 내어 가게 되었다.


아니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외할머니 손을 잡고 절에 다니던 시절이 거의 50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때 계시던 스님께서 오랜 세월 조계사 주지스님으로 계시다가 얼마 전 다시 봉국사의 주지스님으로 와계신 것이 아닌가!


봉국사 만월보전






작가의 이전글 두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