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4 댓글 1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EP.75 해남 37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by 조삿갓 Mar 19. 2025
아래로

어제처럼 세상은 잿빛이었다. 비 오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강해진 바람 덕에 목덜미가 시원했다. 목줄 없는 강아지는 무섭다. 흰 백구가 짖으면서 뒤따라왔다. 뒤를 밟히는 심정이란, 꼭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그 숨 막힘을 아는가. 뻔히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면서도 그러지 않길 바라는 나약함이란 기분을 아는가. 뒤를 계속 돌아보며 큰 소리를 냈다. 그러지 않으면 날카로운 이빨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물 것만 같았다. 엉덩이에 큰 이빨자국이 새겨지면 다행이었다. 자신의 행동반경에서 멀어지자 백구는 쫓아오길 포기했다.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문내면으로 가면서 배추가 많이 보였다. 배추밭이 뭐 이리 많은지 깜짝 놀랐다. 수확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버린 것인지 모를 썩은 배추들도 보였다. 그러다 흰 트럭을 만났다.


"어디까지 가요? 문내면까지 가면 태워줄게!"

고집스러운 도보여행자는 역시나 정중히 거절했다. 마지막 휴식 거점은 버스정류장이었다. 쉬는 중에 주민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어디 가는 거예요?"


도착지를 까먹어 머뭇거렸다.


"이사 가는 거요?"


라고 재차 물었다. 배낭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사라니, 이사라면 이사였다. 내 주거지는 매일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도보여행 중이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대답을 듣고 쿨하게 돌아섰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사람인가요?
세바시 인생질문 1 : 나는 누구인가


욕심이 컸다. 나는 남보다 앞서가고 싶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엄격한 기준을 앞세워 나아갔다. 변화하는 기분에 좋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엔 무너졌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보이자 공허함이 찾아왔다. 좌절했고 실망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무능함이 싫었다. 뛰어나지 못함에 분했다.


무엇을 위해 열심히 하려 했을까. 그냥 좋은 사람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작은 소망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누군가를 뛰어넘고자 하는 욕심이 됐다. 괴로움은 ‘나'가 아닌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너그럽게 바라보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서 나를 봤다. 사람이기에, 생각하는 존재기에, 살아있기에, 누구에게나 욕심은 있다. 그러나 그 욕심을 채울 만큼 내겐 독기가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게 나였다. 쳐다보지 못할 나무를 계속해서 보면 고개가 꺾이기 마련이다. 작은 소망으로 돌아가 너그러워지자.


나조차도 ‘적’이 되지 말자. 자극하고 담금질하고, 몰아붙이는 존재는 차고 넘친다. 그들에게 동조해 자기에게조차 기댈 수 없다면 누가 나를 위로하나. 누가 이해하나. 작은 소망, 그냥 좋은 사람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자.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위해 살자.

이전 03화 EP.74 해남 32km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