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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삿갓 Jun 10. 2024

EP.02 성수→의정부 23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왔다. 찬 바람이 불었다. 적당히 차가운 바람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자식을 달래는 엄마 같았다. 바람은 서서히 몸에 찬 기운을 불어넣으며 비몽사몽인 정신을 깨웠다. 중랑천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중랑천에 비치는 거꾸로 된 세상이 보였다. 서류 가방이 아닌 배낭을 메고, 회사가 아닌 곳으로 걸어가는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 바쁜 발걸음 사이로 걸어가는 나는 방향도 속도도 반대였다. 한때는 출근길에 정신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직업을 가지고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 세상에서 배운 일반적인 삶이었다. 그렇지 않은 나는 언제나 뒤처져 있다는 불안과 함께 살았다. 그들과 같아지려면 직업이 필요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실패로 좌절하고, 자책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과정을 거쳐 결국 직업이 생겼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했다. 일이 많을 때면 야근도 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는데 기분은 앙금 없는 앙금빵처럼 허전했다. 일반적인 삶을 얻고 나니 다른 삶이 눈에 보였다. 직장을 가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저들처럼 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허전했던 마음이 다시금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직장을 뛰쳐나왔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 불안했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에 흥분됐다.


하천에 비친 거꾸로 된 세상이 진짜라고 하면 과연 믿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처음 ‘퇴사’를 부모님에게 말했을 때 나는 그들을 납득시켜야했다. 퇴사를 왜 결정했는지, 이직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 가장 내 편이라 믿었던 부모님의 의문에 점점 겁이 났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한심하게 바라보지 마, 난 헛된 꿈을 꾸는 게 아니야’ 만나는 사람마다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현실적으로 무모한 선택이라는 거 알아.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더 중요해. 그래서 떠나는 거야.”


정말 힘들고 화나기까지 했다. 삶의 주인이 정말 내가 맞는지 싶었다. 나는 왜 무서워하고 눈치 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럴 때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한 장면을 보며 위안 삼았다. ‘내가 나인 것에 다른 사람들의 납득은 필요 없어’. 계속 곱씹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이 져주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떠들 뿐이었다. 당당히 책임질 수 있었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려 노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은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뿐이었다. 아무도 알아줄 필요 없고, 내가 알고 있으면 충분했다.


“거꾸로 된 세상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너를 알아줄 테니까.”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이제는 지나가는 하루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출발부터 왼쪽 팔목에서 진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선물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기대했다. 무슨 소린가 하면 기대했다는 소리다. 전국일주를 떠나는 소식을 아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많은 연락이 오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문득 속물 같은 내가 바보 같았다. 떠나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전국일주 계획을 말하고, 이유를 설명할 때만 해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남들과 다르면 이상하게 보고, 도전과 이상을 꿈꾸는 사람에게 허황되다며 무시하니까 나는 피해자였다. 피해의식은 의심을 부추겼다. ‘멋있다’ , ‘응원한다’라는 말로 응원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 일이 아니니 하는 말이겠거니 의심했다. 그러나 나는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변함없었다. 밥 굶지 말라며, 건강히 다녀오라며, 멋진 도전을 응원한다며 다시금 따뜻한 말과 함께 축하해줬다. 칭찬은 칭찬으로, 응원은 응원으로.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 진심을 매도하고 의심했는지 부끄러웠다. 그 이유는 나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믿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 말은 오죽할까. 이제 이튿날인데 벌써부터 되돌아가야 하나 고민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연락한 사람들 덕분에 좀 더 버틸 용기가 생겼다.


“먹고 싶은 것만 딱 말해. 다 사줄게”라는 대학 동기 녀석의 말에 의정부로 향했다. 서진이(가명)는 대학교 농구동아리 동기이자 기수장이었다. 농구 실력이 좋지 못했던 나는 훈련 나가는 것이 매우 싫었다. 대학교 1학년이라 뭣도 몰랐지만, 실력으로 무시당하는 것도 너무 싫었다(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잘하는 편이었고, 승부욕도 강했던지라 더 싫었다). 즐겁게 농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전혀 달랐다. 서진이와 무척 가까워진 계기는 자취방에서 같이 울게 된 사건 덕분이었다. 서진이 자취방에서 치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서진이가 기수장으로서 고충을 털어놓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내 눈에도 닭똥이 튀었는지 서럽게 울었다. 나도 힘든데 기수장이라고 책임감까지 짊어진 서진이는 얼마나 힘들지 싶었다. 눈물겨운 우정의 탄생이었다. 그때의 일은 우리에게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훈련병 시절에 서진이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같이 울어줬던 것이 고마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곱창을 먹었다. 얻어먹는 음식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무엇보다 친구가 사준 음식이라 더 맛있었다. 서진이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쉬는 날도 없이 학원 강사로도 일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무대에서 즐거웠던 기억이 남아 연기의 꿈도 꾸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해 말할 때면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듣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아직도 걷기에 대해 말할 때면 머뭇거린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누구나 하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걷기가 좋아하는 일이라니 비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 있고, ‘이 정도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스스로 위축됐다. 이것도 어쩌면 욕심일 수 있겠다 싶었다. 좋아하는 일에 정도를 어떻게 매길 수가 있겠는가.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언젠가 서진이처럼 말하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이 전국일주가 끝나면 그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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