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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삿갓 Jun 17. 2024

EP.03 의정부→불암산 13km

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불암산은 산 정상부의 바위가 부처를 닮았다 하여 붙어졌다. 내가 볼 땐 암석이 많아 오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 붙여졌다고 바꾸는 게 어떨지 싶었다. 스파이더맨처럼 거의 기어오르다시피 올랐다. 가파른 경사에 붙어있는 줄을 댕기며 올랐는데, 이것이 없었다면 오르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일은 내겐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산에 오르면 넓은 시야로 내려다보는 재미가 있지만, 나는 가까이서 구석구석 보는 재미가 더 좋다. 굴곡 있는 산보다 평탄한 길이 더 좋다. 그냥 오르는 것이 싫다. 산은 아직 친해지기 어려운 존재다. 오르면 맑은 공기에 취하다가도, 높은 경사를 발견하면 욕이 나왔다. 불암산이 딱 그랬는데 그나마 대형 바위 위에서 바라본 절경 덕분에 욕을 덜 했다. 무엇보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자세를 낮추느라 욕할 생각조차 못 했다.


불암산 4코스 초입에 들어서자, 정자가 보였다. 정자에는 등산객 2명이 식사 중이었다.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두고 가방을 내려놨다. 내심 말을 걸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행하고 계시나 봐요! 역시 젊음이 멋있어~” 마음과 달리 거대한 배낭 덕분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받았다. 머쓱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젊을 적 생각이 났는지 옛이야기를 들려줬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해 배낭에 텐트, 침낭 등을 챙겨서 산에 올랐다고 한다. 나뭇가지들을 모아놓고 옹기종기 모여 캠프파이어 했던 경험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 산에 불 지르면 큰일나지~” 하며 아이처럼 까르륵 웃으셨다. 누구에게나 젊음은 찾아온다. 그리고 젊음은 천천히 아니 빠르게 지나간다. 부모님에게도 젊음이 있었겠지. 어쩌면 나의 젊음은 부모님의 젊음을 빼앗아 얻어낸 산물이 아닐까. 순수하고 희망찬 꿈에 빠진 젊음이 있었겠지. 왠지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희생이라 말하고 싶지 않지만, 희생이라 한다면 이 젊음을 헛되이 낭비하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이 부모님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오르고 또 올랐다. 산에 오르면 가장 많이 묻는 말과 대답이 있다. “얼마나 남았어요”와 “조금만 더 가면 돼요”다. 어릴 적에 대답이 거짓임을 깨닫고 한참 투덜댔던 기억이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등산객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는데 저들은 분명 정상에 올라 투덜댈 것이다. “또 속았네, 또 속았어”. 정상까지 약 150m를 남겨두고 절벽 사이에 있는 데크에서 쉬고 있었다. 한 등산객이 내게 물었다. “어디서부터 오신 거예요?” “의정부에서 오는 길이에요”,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100대 명산을 모두 등반하고 계속 산을 타고 있는데 그 수가 200개에 달했다. 그리고 블랙야크 종주 인증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이 신나 보였다. 불암산 정상에는 태극기가 꽂혀있었다. 밧줄을 이용해야 하는 위험한 곳임에도 사람들은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올랐다. 등산객 아저씨도 멋지게 하나 찍어줬다. 그것으로 만남은 끝났다. 무엇을 아주 오랫동안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산을 계속 타는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향형 인간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은 엄마냐 아빠냐처럼 난제였다. 이럴 때마다 성격이 바뀌길 희망하지만 스트레스받을 뿐이었다. 이젠 그러려니 인정했다. 바뀔 거였음 진작 바뀌었다.   


산 아래를 바라봤다. 역시 산은 정상까지 올라야 했다. 두 손바닥으로 앞을 가리면 저 아래 수많은 건물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내 발아래 있고 저들은 나를 볼 수 없으나 나는 저들을 바라봤다. 신이 이런 기분일까. 거대한 산에 세워진 케이블카는 신이 되고 싶은 욕심의 결과가 아닐지 싶었다. 산은 과연 사람들에게 잊혀 자연 자체로 살아가길 원할까, 파괴됨에도 사람들이 찾아오길 원할까, 자연적이냐 인위적이냐 거대한 고민에 빠질 때쯤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이팅!” 뒤를 돌아보니 부부 등산객이 서 있었다. “아, 네… 하하” 멋쩍게 웃으며 그들을 보냈다. 아까의 고민으로 돌아가 보면 자연적이냐, 인위적이냐의 정답은 전자다. 이미 자연적으로 태어난 존재에게 인위적으로 하려 하는 인간은 불청객이었다. 산은 말할 수 없으니, 인간은 자기 좋을 대로 할 뿐이었다. 다시 산 아래를 바라봤다. 이번엔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만났던 부부 등산객이었다. “내가 김밥이랑 먹을 것 좀 주려고. 맛없어서 주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 허허. 아들 같아서 주고 싶어서 그래” 그는 검은 봉지를 건네주고 보온병에 담긴 커피도 따라줬다. 계속 바람을 맞고 있으니 추웠는데 커피 덕에 따뜻해졌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학생이에요?”, “아니요, 29살이에요” 나이를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종종 보는 반응이라 개의치 않았다. 나름 동안인지라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어 자랑 좀 해봤다. 아, 이게 아닌가. 29살에 이러고 있어서 놀랐던 건가.     


사람들이 하나둘 내려갈 채비를 했다. 나도 텐트 설치를 위해 움직였다. 어젯밤이었다.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산은 처음이라 떨렸다. 여자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던 때보다 더 떨렸다. 여자와 대화 한 번 하겠다고 열심히 검색했던 것처럼 마음의 양식을 채우는 방법이 떨림의 유일한 방안이었다. 결국 새벽 2시에 잠들었다. 일단 준비는 완벽했다. 블로그에서 봤던 데크에 자리 잡았다.(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데크였다). 오징어 팩도 잘 들어가고 이제 텐트를 설치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걱정했는데 허무하게 해결될 상황에 오만해졌다. 왜 벌이 생겼는지 알 것 같다. 오만하지 말라고 바로 시련을 내려주시는 신께 감사드렸다. 데크가 텐트보다 작았다. 그라운드시트를 쫙 펼쳤는데 데크 길이를 넘어가 버렸다. “어? 이건 예상 못 한 일인데…” 당황할 시간이 없었다. 재빨리 포기하고 정상 데크로 향했다. 정상엔 아직 사람들이 많아 빠지기를 기다렸다. 앉아있으며 데크를 보았는데 생각보다 팩을 꼽기에 깊었다. 깊이를 확인할 겸 오징어팩을 데크 틈 사이로 넣었다. 길이가 짧아 설치가 불가했다. 시련이 아직 끝날 때가 아니었나 보다. 발걸음이 급해졌다. 처음 시도했던 데크로 돌아갔다. 딱 5시까지 해보고 도저히 안 되면 포기하자는 마음으로 설치를 시작했다. 데크보다 긴 시트를 고정해야 하는데 방법을 몰랐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근처 나무에 고정해야 하나, 땅에 고정해야 하나 고민했다. 시간은 야속하게 빠르게 흘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폴대를 무작정 끼워 넣었다. 그라운드시트가 팽팽히 고정되지 않고 붕 떴다. 바람이 솔솔 들어올 것 같았으나 지금은 중요치 않았다. 드디어 텐트가 텐트라고 불릴 수 있게 됐다. 저기서 밤새 추위와 싸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엄청나게 좋아했다.  


역시 걱정은 미리 하는 것이 아니다. 약간의 걱정은 실수를 예방할 수 있지만, 과도한 걱정은 시도조차 못하게 만든다. 사실 산에서 자는 것을 포기하고 모텔에서 잘까 알아봤었다. 텐트 설치가 능숙치 못해 눈치보였다. 저것도 못하냐는 식의 놀림감이 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 속을 걷는 걸 좋아하지, 자연에서 자는 자연인은 아니었다. 자다가 야생동물이 나타나면 위험해, 아냐 야생동물보다 사람이 더 위험해같은 이유들을 대며 포기하려했으나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x까! 이번에도 도망칠래, 겁쟁아?” 그래, 퇴사까지 했는데 여기서도 도망치면 전국일주가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냥 했고 성공했다. 이제 산에서도 잘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 않는다면 실패가 없다. 경험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할 수 있다면 하고 보자. 생각보다 별거 없다.


밤이 찾아왔다. 야경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이 낭만을 위해 준비한 간이의자와 탁자를 꺼냈다. 컵라면과 부부 등산객에게 받은 김밥을 올려놨다. 그리고 맥주 한 캔. 수십 개의 별들이 서울로 떨어져 거대한 은하계를 이루었다. 바람을 맥주 한 모금에 시원하게 날려버리고, 후후 불어 입안에 넣는 라면 몇 가닥은 행복을 노래하게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꿨다.


언제까지나 낭만을 꿈꾸겠노라, 그것이 현실을 잊게 만드는 마약이라고 한다면 나는 홀연히 그 마약과 함께 떠나겠노라. 기꺼이 방랑자가 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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