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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돌보 Jul 14. 2023

재패니즈 슬리퍼

나의 첫 칵테일

혼자가 되었을 때 가장 힘이 드는 것은 외로워서가 아니다.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진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 귀중한 줄 몰랐다. 싱글일 때는 친구들과 가지는 시간이 즐거웠고,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결혼을 해서는 매일같이 늦는 남편이 미웠다. 늦는 줄 모르고 끓인 찌개를 혼자 먹는 것만큼 맛없는 식사는 또 없었다. 회식이 잦은 남편은 자주 늦었고, 그때마다 일분일초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쩌다 홀짝대는 맥주에 취기가 올라서는 쓰러져 잠든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내게 닥친 외로움보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느덧 나는 엄마가 되었다. 초보 엄마였고, 서툴렀다. 밤낮없이 아이는 칭얼댔고, 어쩔 줄 몰라 한참을 헤맸다. 당연히 나 혼자만의 시간은 별따기만큼 힘들었고, 화장실조차 가기 어려울 만큼 아이와 한 몸이었다. 그나마 밤잠을 길게 자면서부터 나만의 시간이 조금씩 생기기는 했지만, 하루종일 시달렸던지라 아이를 잠들다 나까지 잠든 날이 부지기수였다. 숨통이 트일 무렵, 뜻하지 않게 취업을 하게 되었고 그야말로 일과 육아의 연속선상 놓인 내가 자유를 누릴 만큼의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둘째가 생겼고, 코로나 시대 속 우리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집 안에 갇혀, 온종일 아이 둘을 보는 신세에 우울감은 더해갔다. 유일한 나의 낙은 아이들을 재우고 홀로 마시는 맥주 한 캔이 전부였다.




징하기도 하다 육아의 늪.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할머니마다 일제히 말해주셨다. 이 시간 금방 지나간다며. 그러나 그때마다 내게는 여전히 먼 미래의 일로만 느껴지곤 했다. 그나마 주말에 남편에게 맡기고 혼자 나선 산책은 씁쓸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갈구하던 나만의 시간을 도무지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고작해야 산책을 표방한 집 동네를 배회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줄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래, 카페라도 가서 커피 한잔 마시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들어 편안치 않았다. 결국엔 핸드폰 화면을 켜고선 아이들 사진을 하나씩 내려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으니까.  


가졌을 땐 그 소중함을 모른다는 말이 이만큼 와닿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들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은 나름대로 자신의 시간을 규모 있게 쓸 줄 아는 멋쟁이들이었다. 사소한 것에 힘들다 투정 부렸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나마 주어진 시간조차 뭐 하나 즐길 줄 모르는 어리석은 나였다.




웬일인지 아이들이 잠에 일찍 들었다. 여느 날이었으면 힘에 부쳐 나 또한 같이 잠에 들던가, 맥주 한 캔에 널브러져 버렸을 텐데, 그날은 웬일인지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낮에 마신 커피 탓인지 그날따라 또렷했다. 혼자라도 분위기 내고 싶었다. 먼지가 수북한 책장에서 읽다 만 여행 수필집을 꺼내 들었다. 얼마 전 남편이 마시겠다고 사둔 미도리가 문득 떠올랐다. 독서에 알맞은 마실거리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되었다 싶었다.


이제껏 남편이 만들어준 술에만 익숙해져 있던 터라 집에 그 많은 칵테일 거리가 있는데도 혼자서 만들어볼 생각을 미처 못했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선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주조방법은 간단했다. 제대로 홈텐딩 분위기 내겠다며 셰이커를 힘차게 흔들어본다. 생각보다 꽤나 재미가 있다.


재패니즈 슬리퍼, 내가 내게 바치는 첫 칵테일. 선명한 연둣빛에 분위기를 내어보겠다며 새빨간 칵테일 체리를 퐁당 떨어트려본다. 늦는 남편이 원망스럽지가 않다. 이게 얼마만이던가, 제대로 즐겨보는 나만의 시간.




미련하게 보내던 지난 나만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새콤한 맛의 칵테일이 미뢰를 감싸 안는다.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베이스로, 오랜만에 집어든 책을 페이지마다 소중히 도 읽어 내려간다. 가끔 아이가 깰까 조마조마하기도 하지만, 그런 스릴마저 즐겁다.  


혼자가 되어 보내는 시간이 그토록 힘이 들었던 것은 나를 가꿀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숱한 혼자의 시간 동안, 하염없이 남편만 기다리며 보내버렸던 삼 년의 세월이 아쉬운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자존감. 어쩌면 그런 영역의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해, 나만을 위해 그 시간을 보다 예쁘게 쓸 수 있었더라면.


한참을 있었을까, 어느새 핸드폰에는 남편의 퇴근을 알리는 문자가 와있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그를 위한 재패니즈 슬리퍼를 한잔 만들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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