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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돌보 Jul 27. 2023

우울할 땐 살림채널을 봅니다


나는 정리하기를 좋아하고, 설거지를 하며 힐링의 시간을 가진다. 가끔은 밀린 살림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살림하는 것은 내겐 숨을 쉬는 것과 같다.


그래서였을까. 한창 살림 채널이 뜨기 전부터 일종의 대리만족을 하듯 찾아보곤 했다. 맘에 드는 채널은 구독까지 하며 꼬박꼬박 챙겨 보았다. 대개의 살림 채널이라 함은 자기 집을 배경으로 정리 정돈하며 요리하는 일상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단순하게는 설거지부터 몰아서 해야 하는 이불빨래, 가전제품에 쌓인 먼지 정리까지 집안에서 벌어지는 곳곳의 살림은 그 범위도 참으로 다채롭다.  


살림 채널에서 빠질 수 없는 백미는 바로 요리다. 깨끗이 정돈된 집에서 끓는 보글보글 찌개소리는 듣기만 해도 참으로 정겹다. 마치 어릴 적 한창을 놀이터에서 뒹굴고 들어온 저녁,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밥 짓는 소리 같은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살림채널을 애정하는 이유다.




야채를 썰며 울려 퍼지는 도마소리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정성껏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줄 생각만 해도 어느새 마음은 몽글몽글해진다. 정다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온 설거지거리를 야무지게 정리하고 마무리될 때의 그 개운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깨끗이 씻은 냄비를 마른 천으로 꼼꼼히 닦아 찬장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다 마른 수저를 수저통에 채워 넣을 때 오늘도 해냈구나 싶은 뿌듯함이 몰려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서둘러 챙겨 먹이고, 등원을 시키고 나면 집에 있는 무선청소기로 바닥을 깨끗이 한다. 잔뜩 헝클어진 이불을 단정히 개고 나면 어느덧 빨래할 시간이 다가온다. 밀린 드라마를 보고 있거든 어느새 다 되었다는 건조기 잔소리가 들려오고 뽀송해진 빨랫감을 고이 개어 서랍장에 삐쭉 튀어나온 것 없이 예쁘게 정리해 놓으면 점심시간이 온다.


하루는 집안일의 연속이었다. 매일 해야만 하는 일종의 근로였지만, 내게는 이보다 더 차분한 시간은 없었다. 가끔은 무기력증으로 힘들어 주저하는 날도 있었지만, 살림은 한없이 깊은 나의 슬픔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갈 때에 그런 나를 구원해 주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살림살이 하나하나에는 나의 기쁨과 사랑이 서려있다. 결혼을 준비하며 마련한 냄비세트, 우연히 지나치던 인테리어샵에서 큰 폭의 세일로 얻어온 와인잔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머그컵 두 잔.




살림 채널을 보는 이유는 실은 대리만족하기 위해서였다. 예쁘게 치장된 집에서 귀여운 앞치마를 두르고 집을 말끔하게 정돈하는 모습. 다 정리된 집에서 즐기는 유기농 야채주스의 한 모금. 우아하고 세련된 음악이 흐르는 집안의 그녀를 동경해 왔다. 누구나 바라는 동화 같은 삶.


또 하나는, 타인의 살림살이를 살펴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었다. 살림살이에 지극히 관심이 많았기에 남들은 어떤 냄비에 어느 주방도구로 음식을 해 먹는지 궁금해했다. 덮고 자는 이불은 어떤 스타일이고 거실창 한편을 장식한 커튼은 어떤 무늬일까. 일종의 관심이라고 해야 할까.


가끔 소개해주는 살림 꿀팁도 애청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쉽게 상하기 쉬운 야채는 어떻게 보관하는 것이 현명한지, 냉장고 정리는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싱크볼 청소는 어떤 도구로 하면 좋을지. 살림을 하며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모범 답안처럼 해내는 그녀들에게 일종의 존경심이 생기기도 했다.나는 생각도 할 수 없던 것들을 그녀들은 척척 해내곤 했다.


살림이 하기 싫은 날에는 언제나 애청하던 살림채널을 켜놓고서 집안일에 몰입하기도 했다. 나는 끝내 그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어설픈 흉내를 내며 그릇을 정리하고, 소파의 먼지를 털어낸다. 창틀의 먼지는 보이는 틈틈이 닦아본다. 우리 집은 영상에서만큼 인테리어가 훌륭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집이었지만, 어릴 적 끌어안고 지냈던 애착인형처럼 내게는 최고로 멋진 장소였다. 그런 나와 우리의 '곳'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쩌면 살림이 참 그렇다. 그저 끼니를 해결하고 잠을 자고 오늘의 일과를 해내기 위한 잡동사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을 매일 돌보고 아껴주는 일만큼 우리 생활에 근간이 되는 일도 없는 것 같다. 오늘도 해내고 지쳐 들어온 나를 포근히 안아줄 '우리 집'과 나의 공간. 어릴 적 엄마가 아껴온 그 압력밥솥 같은 정겨움이 우리 집에도 언제나 묻어져 나오기를 오늘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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