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 스물 두번째 글
쇠퇴한 일부 지하도상가를 걷다 보면 문이 닫힌 점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불 꺼진 유리문, 낡은 포스터, 임대 문의 연락처만 붙은 채 그대로 세월을 버틴다.
그 앞을 매일 수천 명이 지나가지만, 아무도 멈춰 서지 않는다.
공실은 단지 ‘비어 있는 점포’가 아니라, 상권의 침체를 상징하는 신호다.
그러나 이 공실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다면, 그것은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첫째, 공실은 상권 진단의 바로미터다.
공실이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임대료가 높아서일 수도 있고, 고객의 동선이 끊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로는 단순히 “지나가기만 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공실은 시장의 문제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래서 공실을 줄이려면 먼저 ‘왜 이 공간이 비었는가’를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유동인구, 고객층, 인접 업종, 임대 구조를 종합적으로 진단해야 한다.
둘째, 공실을 단순한 손실이 아닌 ‘실험실’로 바꿔야 한다.
세계 여러 도시에서 공실은 ‘도시 실험의 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 오사카의 우메다 지하상가는 유휴 점포를 활용해 ‘팝업 아트 갤러리’를 열었다.
단기간 운영을 통해 예술가와 창업자들이 공간을 시험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서울에서도 일부 지하도상가에서 청년 창업자에게 단기 임대 형태로 ‘팝업존’을 제공하며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공실을 단기적 임대 실패로만 보지 말고, 도시의 창의적 실험공간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공실은 콘텐츠 재설계의 출발점이다.
지하도상가가 과거에는 ‘물건을 파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이야기를 파는 곳’이 되어야 한다.
공실을 단순히 다른 점포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실을 ‘공유형 라운지’로 바꾸거나, ‘소규모 전시·체험 공간’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일례로 빈 점포를 활용해 ‘소상공인 공동 포장 공간’을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객들은 쇼핑 후 짐을 보관하고, 커피를 마시며 쉴 수 있게 되었고, 상인들은 그 공간을 통해 재구매 고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공실은 새로운 기능을 실험할 수 있는 여백이 된다.
넷째, 공실 문제는 디자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공실을 줄이려면 점포 디자인보다 임대 구조와 운영 방식의 유연성이 우선이다.
지하도상가는 공공기관이 관리 주체인 경우가 많아, 계약 절차가 복잡하고 임대 기간이 길다.
하지만 오늘날의 소비 트렌드는 빠르게 변한다.
3년, 5년 단위의 임대 구조는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공정한 경쟁입찰 제도로 인해 공실이 발생해도, 바로 빈점포를 채울 수 없는 문제도 없다.
신속한 공실 활용 및 고령상인들을 대체하는 청년상인의 유입을 촉진하는 기회도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창업자들이 부담 없이 진입할 수 있고, 상권은 지속적으로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다.
다섯째, 공실을 ‘공유 공간’으로 설계하면 상생의 플랫폼이 된다.
지하도상가의 가장 큰 약점은 ‘협력의 부재’다.
각 점포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상인회조차 공동의 마케팅을 진행하기 어렵다.
이때 공실을 ‘공동 창작실’, ‘공용 물류공간’, ‘공유 마케팅 존’으로 재구성하면 상인 간의 협력 기반이 생긴다.
일부 공실을 ‘상인 공동 포토존 및 SNS 홍보 공간’으로 꾸미며 젊은 층 유입을 이끌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공실을 비워두는 것은 위험보다 더 큰 기회비용이다.
비어 있는 점포는 상권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주변 점포의 매출에도 악영향을 준다.
심리적으로 “이곳은 죽은 상권”이라는 인식이 퍼지면, 단 한 달의 공실도 회복에 몇 년이 걸린다.
따라서 공실 관리에는 ‘속도’가 중요하다.
지자체나 관리기관은 빈 점포가 생기면 즉시 활용 가능한 임시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업자 테스트베드, 로컬 브랜드 팝업, 시즌별 문화 행사 등을 빠르게 연결하는 것이다.
일곱째, 공실 재설계는 ‘사람의 흐름’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공간은 언제나 사람이 만든다.
사람이 모이면 상권이 살아나고, 관계가 만들어진다.
공실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는 곧 상권의 생명력이 끊긴다는 의미다.
결국 공실을 채우는 일은 단순히 점포를 다시 임대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움직임을 되살리는 문제다.
일레로, 직장인 많은 중심가 지하도상가는 일부 공실을 활용해 ‘직장인 야간 체험존’을 시범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퇴근 후 사람들이 간단히 즐길 수 있는 원데이 클래스, 전시, 팝업 이벤트를 열어 직장인을 유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실은 ‘정체된 상권의 문제’에서 ‘도시 활력의 실험실’로 변신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지하도상가의 공실 문제는 분명 심각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창의적인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여백이기도 하다.
공실을 ‘결함’으로 볼 것인가, ‘기회’로 재구성할 것인가는 결국 시각의 문제다.
그 여백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지하도상가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이제는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의미를 다시 짜야 할 때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