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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술·문화·전시 공간으로서의 가능성

『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 스물 세번째 글

by 멘토K

지하도상가를 떠올리면 대부분은 ‘상점’과 ‘통로’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공간을 다르게 보면, 그것은 도시의 ‘빈 페이지’이기도 하다.
빛이 제한된 공간, 낮은 천장, 반복되는 기둥들—이것들은 오히려 예술과 문화가 스며들 수 있는 독특한 무대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다.


서울 종로구의 낙원상가 지하에는 한때 ‘오디오 상가’로만 알려졌던 구역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그 일부가 청년 아티스트들의 전시공간으로 변신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벽면에 LED 조명을 설치하고, 오래된 쇼윈도를 작품 전시용 유리박스로 활용한 것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은 “이런 공간이 있었나?”라며 다시 발길을 멈췄다.
지하공간은 단순히 ‘낮은 곳’이 아니라, 도시의 또 다른 층위(layer) 를 보여주는 문화의 무대가 될 수 있다.


첫째, 지하도상가는 도시 속 가장 접근성 높은 문화공간이다.
지하철역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매일 수만 명의 시민이 지나간다.
그만큼 ‘우연히 예술을 만날 확률’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예술이 꼭 미술관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파리의 ‘메트로 갤러리’, 도쿄의 ‘시부야 스트리트 갤러리’, 오사카의 ‘난바 워크 아트로드’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공간에서 예술은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서울도 이와 같은 ‘도시 속 전시장’으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둘째, 지하 공간의 물리적 한계가 오히려 예술적 가능성이 된다.
지상보다 낮은 곳,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은 본래의 역할이 아닌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 쉽다.
예술은 늘 ‘빈 공간’에서 시작된다.
한때 버려진 창고였던 성수동의 ‘Layer 57’이나 ‘플라츠’가 도시의 핫플레이스로 부상한 것도
바로 이 ‘낡음과 여백의 미학’을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지하도상가 역시 조금의 디자인 감각과 조명 연출, 그리고 기획력만 있다면
“서울 도심 한가운데 숨겨진 예술지하”로 변모할 수 있다.


셋째, 문화공간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상권 재생의 전략이다.
문화 콘텐츠는 유입의 이유를 만든다.
‘볼거리·머물거리·사진 찍을 거리’가 생기면 고객의 동선이 달라지고,
결국 매출의 구조도 바뀐다.
문화는 상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가장 부드럽고 강력한 전략이다.


넷째, 예술과 상업의 공존이 가능해야 한다.
지하도상가의 가장 큰 과제는 ‘예술로 채워졌지만 수익이 안 나는 구조’를 피하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모델이 되려면 예술과 상업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이 전시 기획을 맡고, 상인회는 전시 기간 중 연계된 할인행사나 체험부스를 운영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그림을 감상하고, 다른 쪽에서는 지역 소상공인의 브랜드 상품을 체험한다면
상권과 예술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문화상권의 조건이다.


다섯째, 공간의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지하도상가에는 오랜 역사와 추억이 있다.
그 시간의 층위를 디자인적으로, 감성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새로운 세대에게 “그때 그 시절의 서울”을 경험하게 하는 강력한 문화자산이 된다.
예를 들어, 청계천 인근의 광통교 지하상가에서는
옛날 도심 풍경을 주제로 한 사진전과 음악회가 열리며,
한 세대의 기억을 다음 세대가 체험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지하도상가는 단지 오래된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기억을 담는 박물관”으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하다.


여섯째, 지속성을 담보할 기획력과 운영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화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면 상권에는 오히려 공허함이 남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라 상설 문화 플랫폼이다.

‘월별 테마 전시’, ‘지역 작가 레지던시’, ‘지하 버스킹 라운지’, ‘창작 워크숍 존’ 같은 지속 프로그램이 운영되어야 한다.

특히 상인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협력 구조를 만들면,
예술이 상권의 일부로 정착될 수 있다.


지하도상가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과거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 인식의 틈을 문화로 채우면, 그것은 ‘미래의 공간’이 된다.
예술과 문화는 결국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힘이다.
지하도상가의 부활은 거대한 재건축이나 예산이 아니라,
사람의 감성과 이야기가 다시 흐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 멘토 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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