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 스물 번째 글
지하도상가에 오래 머물러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늘 빠르게 지나가고, 그곳에서 굳이 시간을 쓰려 하지 않는다.
나는 꽤나 오랜동안 여러 도시의 지하도상가를 다니면서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았다.
“머물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것이 지하도상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숙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머무는 공간’이 된 지하도상가는 상권 구조 자체가 바뀐다.
고객이 한 번만 멈춰도 시선이 달라지고, 시선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매출 구조도 바뀐다.
지하도상가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머무는 힘”에서 시작한다.
나는 몇 해 전, 해외 지하도상가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보았다.
오래된 쇼핑통로 한가운데에 작은 벤치와 조명을 설치해놓았는데, 그곳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 전시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다 잠시 기지개를 켜는 직장인들.
그 공간은 단지 ‘앉을 수 있는 구역’이 아니라 잠시 쉬었다 갈 선택지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지하도상가는 ‘머물지 않는 공간’이라는 편견을 깬 장면이었다.
우리의 지하도상가는 어떤가?
대부분은 통로 중심에 설계되어 있고, 목적은 단 하나—“빠르게 지나가라.”
머무를 자리도, 이유도, 흥미도 없다.
그런 구조에서 머무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인테리어 교체’를 넘는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머무는 공간에는 감각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벤치만 설치한다고 사람들이 앉지 않는다.
그곳이 밝아야 하고, 깨끗해야 하고, 편안해야 한다.
지하도상가는 선입견이 강하다.
어둡고, 눅눅하고, 답답하고, 노후됐다는 이미지를 먼저 극복해야 한다.
내가 현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앉을 수 있는데도 앉지 않아요.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맞다. 사람은 공간을 판단할 때 아주 작은 요소를 예민하게 본다.
조명의 색온도, 바닥의 질감, 소음의 반향, 냄새까지 모두 판단의 대상이다.
머무는 공간은 결국 감각의 총합이 만드는 경험이다.
둘째, 머무는 공간은 목적을 제공해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어디서나 쉴 수 있다.
카페, 라운지, 서점, 몰, 호텔 로비, 심지어 길거리 벤치까지도 매력적인 공간이 넘친다.
그런 상황에서 지하도상가가 ‘머물 공간’으로 기능하려면 명확한 이유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 전시를 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
– 잠시 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충전존
– 간단히 물을 마실 수 있는 정수·휴식 포인트
– 로컬 브랜드 팝업을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스테이지
– 지하철·버스 환승객을 위한 빠른 정보 서비스 데스크
머무르는 이유, 즉 “나에게 도움이 되는 공간”이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셋째, 머무는 공간은 상인들과 연결되어야 한다.
리모델링을 아무리 멋지게 해도 상인의 참여가 없으면 공간은 금세 ‘행사 후 버려진 이벤트홀’처럼 변한다.
지속 가능성은 결국 운영에 있다.
한 번은 서울의 한근 지하쇼핑센터에서 공공기관이 진행한 전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행사 기간에는 사람이 몰렸지만 이후 상인 참여가 없어 전시존이 텅 빈 채로 남아 있었다.
그 공간은 다시 ‘빠르게 지나가는 통로’로 돌아갔다.
머무는 공간은 상업과 문화가 서로의 옆자리를 존중하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전시가 끝나도 상인이 그 장소를 연계해 이벤트를 이어가고, 고객도 자연스럽게 매장을 드나들어야 한다.
그래야 공간은 지속성을 가진다.
넷째, 머무는 공간은 고객 동선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많은 지하도상가가 ‘구석에서 변신을 시도’한다.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가장 많이 지나는 곳에서 멈춘다.
환승 동선, 출입구 바로 앞, 주요 회랑 중심—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핵심이다.
머무는 공간을 만든다고 할 때, 기획의 첫 문장은 늘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가는 곳을 찾아라.”
머물기 위해서는 ‘보여야’ 한다.
그리고 보여야 경험이 된다.
다섯째, 머무는 공간은 도시의 흐름과 맞아야 한다.
요즘 도시의 트렌드는 보행권 확대다.
지상의 도로를 차에서 사람에게 돌려주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고,
그 결과 거리가 깨끗해지고, 걷기 좋은 환경이 늘어나고, 카페와 상점이 길가로 확장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지하도상가는 상대적으로 매력이 약해지고 있다.
따라서 지하도상가의 머무는 공간은 ‘지상의 강점과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지상과 연결되는 또 다른 경험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지하만의 장점—기후 영향 없음, 안정된 온도, 조용함, 안전함—을 활용해야 한다.
지상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머무는 이유가 생긴다.
나는 지하도상가가 ‘편의의 공간’에서 ‘경험의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변화는 화려한 인테리어보다 작은 감각의 개선, 동선의 재배치, 상인의 참여,
그리고 고객이 “여기, 잠깐 머물고 싶다”라고 느끼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머무는 공간은 결국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힘이다.
지하도상가의 부활은 그 힘에서 시작된다.
빠르게 지나가는 통로가 아닌, 도시 속 작은 쉼표.
그 쉼표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지하도상가 변신의 첫 문장이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