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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공용 공간과 편의시설 부족의 현실

『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 스무번째 글

by 멘토K


지하도상가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다른 시대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상점들은 여전히 촘촘히 늘어서 있고, 통로는 좁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건 ‘머물 공간의 부재’다.
잠시 앉아 쉴 자리도, 짐을 내려놓을 곳도, 휴대폰을 충전할 곳도 없다.
그저 ‘지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 이것이 지금 지하도상점가의 가장 큰 문제이자 한계다.


첫째, 공용공간의 부재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고객의 체류를 막는다.
현대의 소비공간은 ‘머무는 경험’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카페, 북라운지, 포토존, 그리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벤치 하나까지도 고객의 체류를 늘리는 요소다. 그러나 지하도상가는 여전히 1970년대식 구조, 즉 “점포만 빼곡한 통로형 상가”에 머물러 있다.
소비자들은 빠르게 통과하고, 상인은 오랜 시간 그 통로를 지키지만,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다.’


둘째, 편의시설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낡았다.
화장실은 접근성이 나쁘고, 일부는 위생 상태가 좋지 않다. 공조시설은 노후돼 공기가 탁하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냉기만 흐른다. 안내 표지판은 세월의 흔적이 묻은 채 방치돼 있다.
‘청결하고 쾌적한 공간’은 기본이지만, 지하도상가는 그 기본을 지키기 어렵다.

셋째, 휴식과 커뮤니티 기능이 완전히 사라져 있다.
한때 지하도상가는 출퇴근길 직장인, 학생, 주부들이 잠시 들러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정서가 없다.
휴게 공간이 없으니 ‘머무름’이 불가능하고, 머무름이 없으니 ‘관계’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면 지상 복합몰이나 대형 서점, 카페거리들은 소비를 넘어 관계와 시간을 공유하는 장소가 되었다. 지하도상가는 여전히 ‘판매 중심의 낡은 시스템’에 갇혀 있다.


넷째, 관리 주체의 분절성도 문제다.
지하도상가는 대부분 공공기관(지하철공사, 시설관리공단, 위탁운영사)이 관리하고 있으며, 별도의 상인회가 있는 경우가 다수이다.


다섯째, ‘공간 디자인’에 대한 철학 부재다.
지하도상가의 공간은 여전히 ‘판매 효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비공간은 디자인이 곧 매출이다. 공간의 시각적 쾌적함, 감성적인 조명, 여백 있는 통로, 청결한 시설가 고객의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에서 지하도상가는 시대적 감수성과 단절돼 있다.

여섯째, 안전과 접근성의 문제도 공용공간 부족과 맞물려 있다.

지하도상가의 비상대피로는 협소하고, 재난 시 대응 동선이 복잡하다.
공간의 구조가 사람 중심이 아니라 ‘시설 중심’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지하 공간의 특성상 화재, 침수, 정전 등 비상상황에 대비하려면, 공용공간이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안전의 완충지대’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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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지하도상가는 오랫동안 “상점의 집합”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공간의 경험”이 소비를 이끌고, “편의의 체감”이 고객의 재방문을 결정짓는다.
공용공간과 편의시설의 부재는 단지 물리적 부족이 아니라, 철학의 부재다.
‘사람을 위한 공간인가, 점포를 위한 공간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이제는 필요하다.


지하도상가는 단순히 시설 개선의 대상이 아니다.
그 안에는 공간을 새롭게 해석할 기회가 숨어 있다.
휴식이 있는 통로, 체험이 있는 상가, 안전이 보장된 생활형 공간—그 방향으로 한 발만 나아간다면, 지하도상가는 다시 도시 속 숨은 쉼터가 될 수 있다.


이제는 ‘판매’보다 ‘체류’, ‘시설’보다 ‘사람’을 중심으로 설계할 때다.


- 멘토 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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