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 열 여덟번째 글
요즘 대형 복합몰에 가보면, 마치 하나의 도시 같다. 쇼핑뿐 아니라 식사, 영화, 전시, 체험, 심지어 업무와 휴식까지 모두 가능한 ‘라이프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반면 지하도상점가는 여전히 수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 멈춰 있다.
낮은 천장, 좁은 통로, 단조로운 상품 배열,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새겨진 간판들.
어느새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복합몰로 향하고, 지하도상가는 그 그림자 속으로 더 깊이 묻혀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왜 지하도상점가가 대형 복합몰과 경쟁이 되지 않는지를, 그리고 그 차이가 단순한 ‘규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체류형 소비’와 ‘통과형 소비’의 차이다.
복합몰은 소비자의 체류 시간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된다. 예컨대 스타필드 코엑스몰이나 현대백화점 더현대서울을 보면, 쇼핑보다 ‘머무름’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고객은 쇼핑을 하지 않아도 쉴 곳이 있고, 볼거리가 있으며, SNS에 올릴 수 있는 포토존이 곳곳에 있다.
반면 지하도상가는 ‘이동 통로’ 중심이다. 대부분 직장인이나 학생이 이동 중 잠깐 들르는 구조로, 머무를 이유가 없다. 공간의 철학 자체가 다르다.
둘째, 상품 구성의 다양성과 큐레이션의 수준이다.
복합몰은 ‘고객 세분화’와 ‘콘셉트 마케팅’이 철저하다. 예를 들어 성수동의 피어59나 한남동의 현대카드 바이브는 특정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고객층을 정밀하게 타깃한다.
반면 지하도상가는 여전히 2000년대 초반의 의류·액세서리 중심 업종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10곳 중 7곳이 유사한 품목을 판매하며, 차별화된 큐레이션이 거의 없다.
소비자가 “들러볼 이유”를 찾기 어렵다.
셋째, 공간 경험의 질적 차이다.
대형몰은 빛, 향, 음악, 휴식공간 등 ‘감각의 경험’을 설계한다.
반면 지하도상가는 조명은 어둡고, 공조시설은 낡았으며, 방향 안내조차 명확하지 않다.
좁고 폐쇄적인 구조는 자연스럽게 체류 시간을 줄인다.
‘쇼핑’의 본질이 물건을 사는 행위에서 ‘공간을 경험하는 행위’로 바뀐 시대에, 지하도상가는 여전히 20세기적 물리 환경에 머물러 있다.
넷째, 브랜딩과 마케팅 역량의 차이다.
복합몰은 매출보다 브랜드의 ‘경험 가치’를 먼저 설계한다. “이곳에 오면 나답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고객에게 심는다. 스타필드의 “테마형 체험 쇼핑몰”, 롯데월드몰의 “하이브리드 쇼핑 시티”, 더현대서울의 “자연 속 도시”라는 콘셉트는 단순한 광고 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공간 전체가 고객의 감정을 설계한 결과다.
반면 지하도상가는 ‘홍보’는커녕 기본적인 통합 브랜드조차 없다. 개별 점포가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상가 전체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희미하다.
다섯째, 고객 여정의 데이터화와 피드백 구조다.
복합몰은 매출과 방문객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고객의 이동 동선, 체류 시간, 재방문율 등을 기반으로 테넌트 구성과 이벤트를 조정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하도상가는 이런 데이터가 없다. 유동인구 조사는 간헐적으로 이뤄지고, 고객 피드백은 상인 개별의 경험에 의존한다. 결국 ‘감’에 의한 운영이 반복되며, 변화의 타이밍을 놓친다.
서울 명동의 롯데영플라자, 잠실의 롯데월드몰, 강남의 코엑스몰, 부산의 신세계 센텀시티는 모두 주변 지하도상가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그 연결은 유입을 위한 ‘입구’이지, 소비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실제로 명동 지하상가는 한때 롯데백화점과 직결된 덕분에 유동인구가 많았지만, 현재는 대부분 단순 통로로 이용된다.
반면 코엑스몰은 같은 지하공간이지만, ‘콘텐츠형 공간’으로 재구성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즉, 같은 지하공간이라도 ‘의도된 경험 설계’가 있느냐 없느냐가 경쟁력의 본질이다.
지하도상가는 규모의 경쟁이 아니라, 의미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하도상가가 복합몰과 경쟁하기 위해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첫째, ‘작지만 특별한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
대형몰은 모든 것을 갖추지만, 그만큼 정형화되어 있다. 반면 지하도상가는 공간이 작고 유연하다. 이를 장점으로 삼아 팝업형 매장, 로컬 브랜드 전시, 문화예술 체험 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
둘째, 고객의 ‘이동 이유’를 ‘머무름 이유’로 바꿔야 한다.
출퇴근, 환승, 날씨 피하기 같은 기능적 이유를 감성적 체험으로 전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 직장인을 위한 ‘10분 힐링존’, 퇴근길 라이브 버스킹, SNS 체험 포인트 등이 좋은 예다.
셋째, 지자체와 상인회, 운영주체가 함께 데이터 기반 관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매출, 유입, 공실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시각화하여 전략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지하도상가는 더 이상 ‘통로’로 머물 수 없다. 복합몰이 도시의 중심을 삼켰다면, 지하도상가는 그 틈새에서 사람들의 ‘틈’을 채워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작지만 유연한 공간이 오히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지하도상가의 생존은 규모가 아니라 ‘해석의 전환’에 달려 있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