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 열 일곱번째 글
지하도상가는 도시의 혈관 같은 교통망 위에 만들어진 상권이다.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을 잇는 통로, 즉 사람들의 ‘이동 경로’가 곧 고객의 발걸음이었고, 그것이 곧 매출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동선이 바뀌고 있다.
환승의 흐름이 달라지자 지하도상가의 운명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첫째, 도시 교통의 중심축이 달라졌다.
과거엔 지하철과 버스의 환승이 ‘도심 중심부’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명동, 종로, 강남, 영등포처럼 유동 인구가 몰리는 곳마다 지하도상가가 생겼다.
출퇴근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지하도를 거쳐 이동했고, 이 흐름이 매출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이제 환승의 중심은 ‘거점형 복합환승센터’로 이동하고 있다.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 공덕, 청량리, 수서, 김포공항역 등이 대표적이다.
교통과 쇼핑, 문화시설이 결합된 복합공간으로 변화하면서, 전통적인 지하도상가의 기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둘째, 환승 동선이 더 짧고 효율적으로 설계되고 있다.
지하철·버스 간 환승 시간을 줄이기 위한 구조 개선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복잡한 지하도를 오래 거치지 않는다.
출구와 정류장이 직결되거나, 엘리베이터·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설계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지하도상가의 ‘필수 통로’ 역할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단지 더 빨리, 더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지하를 이용할 뿐이다.
셋째, 모바일 환경이 동선을 바꾸었다.
예전엔 이동 중 시간 때우기나 날씨 피하기 위해 지하상가에 들렀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온라인 쇼핑을 하고, 지하철 안에서 커피 배달을 주문한다.
이동의 공백 시간이 디지털로 채워지면서, 지하도상가가 제공하던 ‘잠시 머무름의 공간’ 기능이 사라졌다.
소비의 시간과 장소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 보행자 중심 도시구조로의 전환이다.
최근 도시계획의 흐름은 ‘보행의 지상화’다.
차량 중심의 도로 구조에서 벗어나, 지상 보행환경을 넓히고 쾌적하게 만드는 추세다.
서울 종로 일대만 보더라도 과거엔 횡단보도보다 지하도를 통해 이동했지만, 지금은 지상에서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도록 정비됐다.
그 결과, 보행자의 흐름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동했다.
깨끗하고 열린 공간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심리와 맞물려 지하도상가의 유입률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다섯째, 버스·지하철 환승 패턴의 개인화다.
교통카드 빅데이터를 보면, 출퇴근 시간대의 환승 패턴이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재택근무와 유연근무제 확산, 생활권 단축 현상으로 인해 ‘정해진 시간, 정해진 동선’이 무너졌다.
예전처럼 아침 8시, 저녁 6시에 몰리던 유동 인구가 분산되면서 지하도상가의 핵심 시간대가 약해졌다.
상점들이 집중적으로 매출을 올리던 ‘러시아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사례를 보자.
강남역은 하루 평균 20만 명 이상이 오가는 국내 최대 환승 거점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도상가의 일부 구간은 공실이 생기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환승객이 매장을 ‘통과’할 뿐, ‘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수서역이나 고속터미널역은 교통시설과 복합몰이 결합돼 있다.
환승객이 이동 중에도 커피를 마시고, 쇼핑을 하고, 대기 시간을 경험으로 소비한다.
단순한 통로에서 ‘머무는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이 차이가 바로 지하도상가의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이동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긴 어렵지만, 그 안에서 머무를 이유를 만들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지하도상가 출구 근처에 간단한 휴식공간, 푸드존, 체험형 매장을 조성하면 환승객의 발걸음을 잠시 붙잡을 수 있다.
또한, 지역의 브랜드나 로컬 콘텐츠를 결합해 ‘지하 속 작은 도시’처럼 꾸민다면 새로운 소비 경험을 제공할 수도 있다.
결국, 지하도상가의 미래는 환승객을 어떻게 다시 고객으로 돌려놓느냐에 달려 있다.
환승 동선이 짧아진 시대일수록, 머무를 이유는 더 강렬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과 이동의 속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경험의 밀도’다.
지하도상가는 더 이상 단순한 이동 공간이 아니라, 이동의 틈을 경험으로 바꾸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