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중용의 길_1부_극단의 시대』 아 번째 글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SNS의 파도 속을 헤엄친다.
뉴스보다 빠른 속도로 감정이 오가고,
좋아요와 댓글이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공간은 ‘소통의 장’이 아니라
‘감정의 전쟁터’로 변했다.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증명하려는 싸움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에서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균형을 잃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발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SNS 시대는 이 구절의 반대편에 서 있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없다.
감정은 즉각 발현되고, 절도는 사라졌다.
‘중(中)’은 사라지고, ‘화(和)’는 깨졌다.
댓글 하나, 영상 하나가 사람의 하루를 뒤흔들고,
분노와 열광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SNS의 알고리즘은 인간의 ‘이성’보다 ‘감정’을 더 정확히 계산한다.
기분 좋은 글보다 분노를 자극하는 글이 더 오래 머무르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자극적인 세상 속으로 들어가며
‘공유된 현실’이 아니라 ‘조작된 감정의 세계’ 속에 갇힌다.
『중용』의 저자 자사(子思)는 말했다.
(중용지위덕야, 기지의호. 민선구의)
“중용의 덕이란 지극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그것을 잃어버렸다.”
공자의 시대에도 인간은 중심을 잃기 쉬웠다.
하물며 오늘날, SNS 알고리즘이 인간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자극하는 시대에
중용의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좋아요’의 개수로 가치가 측정되고,
‘공유’의 속도로 정의가 결정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다.
나는 어느 날, SNS에서 한 사건을 둘러싼 댓글을 읽다가 무언의 피로를 느꼈다.
사람들은 사건보다 감정에 반응했고, 논리보다 분노의 강도에 집중했다.
누군가는 정의를 말했고, 누군가는 악을 외쳤지만,
그들의 언어는 닮아 있었다.
모두 ‘나만 옳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을 잃은 언어’였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조화롭되 같지 않고, 소인은 같되 조화롭지 않다.”
군자는 생각이 달라도 조화를 이룬다.
소인은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불화가 있다.
SNS 속 우리의 모습은 후자에 더 가깝다.
겉으로는 ‘연대’와 ‘공감’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동조 압박’과 ‘감정 경쟁’이 가득하다.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조용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검열 속에 갇히고, ‘진짜 나’ 대신 ‘보여지는 나’를 연기한다.
『중용』은 인간이 본래 지닌 성(性)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이 부여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그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즉, 사람은 본래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러나 지금의 SNS는 그 본성을 거슬러
‘분리’와 ‘대립’을 강화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같은 관심사로 모이지만,
결국 ‘나와 다른 이’를 더욱 멀리하게 된다.
이것은 『중용』이 경계한 실기소중(失其所中),
즉 ‘자기의 중심을 잃는 상태’다.
나는 요즘 SNS를 보며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가 알고리즘을 이용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알고리즘이 우리의 감정을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확신에 빠지고,
타인을 이해할 여유를 잃는다.
그 결과, 세상은 ‘정보의 시대’가 아니라 ‘감정의 시대’로 변했다.
하지만 공자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성자, 천지도야; 사성자, 인지도야)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道)요,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다.”
이 말은 SNS 시대에도 그대로 통한다.
성실(誠)은 진심의 다른 이름이다.
누군가를 향한 말 한 줄,
공유하는 글 하나에도 ‘성실함’이 담긴다면
그것은 이미 중용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진심은 알고리즘이 계산하지 못하는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SNS를 떠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태도’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중용은 세상을 떠나는 철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중심을 지키는 철학이다.
즉, 세상과 연결되되, 휘둘리지 않는 태도.
그것이 SNS 시대의 중용이다.
『중용』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지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중(中)과 화(和)가 이루어지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
이 말은 지금의 디지털 세상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감정이 폭발하는 공간 속에서도,
우리 마음이 중(中)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화(和)가 가능하다.
알고리즘은 감정을 자극하지만,
중용은 감정을 다스린다.
그 다스림 속에서만 우리는 다시 인간다운 대화를 회복할 수 있다.
SNS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편입니까?”
하지만 중용의 지혜는 조용히 대답한다.
“나는 편을 들지 않는다. 나는 중심에 선다.”
그 중심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며,
이 감정의 전쟁터를 인간의 공간으로 되돌리는 유일한 길이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