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중용의 길_1부_극단의 시대』 번째 글
아침에 뉴스를 켜면 세상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어제까지 조용하던 문제가 오늘은 “충격”, “파문”, “일파만파”라는 말과 함께 폭발한다.
한쪽 채널에서는 분노가 넘치고, 다른 쪽 채널에서는 마치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하듯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무엇이 사실인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뉴스를 보고 나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더 피곤해진다.
언론은 원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사건을 향해 달려가는 감정을 한 번 식혀주고, 사실을 정리해 보여 주면서 각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돕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요즘의 언론은 중심이 아니라 진영에 서 있다. 누군가는 이쪽 편의 마이크를 쥐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쪽 편의 스피커가 되어 있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기보다 ‘편’에 서라는 압박을 받는다.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에서 중용의 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렇게 말한다.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중용지위덕야, 기지의호, 민선구의).”
“중용의 덕이란 지극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그것을 잃어버렸다.”
언론이 중심을 잃은 모습은 바로 이 구절의 현대판이다.
사실과 거리를 두고 균형을 잡는 대신, 더 자극적인 제목, 더 큰 분노, 더 빠른 유통을 향해 달려간다.
언론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광고, 클릭 수, 시청률이라는 숫자가 언론의 생존을 좌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언론은 “무엇이 중요한가”보다 “무엇이 더 잘 팔릴까”를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차분한 해설보다 자극적인 단어가, 균형 잡힌 분석보다 한쪽을 세게 때리는 논평이 더 많은 주목을 끈다.
결국 언론도 시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극단으로 밀려나 버렸다.
『중용』의 첫머리는 인간과 세상의 질서를 이렇게 설명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教(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이 부여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그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언론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본래의 성(性)은 공공성을 향해 있다. 사실을 전달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사회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도록 거울을 비추는 것이 그 본성이다.
그러나 이 성(性)을 따르는 길, 도(道)를 잃으면 언론은 교묘한 선동과 상업적 도구로 전락한다.
일부 뉴스와 보도는 현장에서 본 사실보다 뉴스 제목이 훨씬 자극적이거나, 자극적인 뉴스로 도배되는 상황이 존재한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악의든, 악의가 아니든, 편집 과정에서 ‘극적인 장면’만 남고 맥락과 균형은 사라진 경우일 것이다.
공자는 인간의 감정이 절제를 잃을 때 생기는 혼란을 이렇게 설명한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드러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뉴스는 원래 이 ‘절도’를 지켜야 하는 영역이다.
사건이 주는 감정을 그대로 부어넣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뉴스는 오히려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분노는 더 크게, 공포는 더 깊게, 혐오는 더 날카롭게 꾸며져 전달된다.
이럴 때, 사회 전체는 화(和)를 잃고, 중(中)을 잃는다.
언론이 중심을 잃었다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중심을 잃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언론은 시장이 원하는 것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가 더 자극적인 것을 클릭하고, 더 극단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언론은 그 방향으로 더 빠르게 달려간다. 그래서 문제는 단지 ‘언론 탓’이 아니기도 하다.
우리 안의 중용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용』은 또 이렇게 말한다.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성자, 천지도야; 사성자, 인지도야).”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요, 성실하려고 애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
언론이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무엇보다 이 ‘성(誠)’을 회복해야 한다.
모든 사실을 완벽히 다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진실에 다가가려는 정직한 노력,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왜곡하지 않으려는 태도, 이것이 언론이 다시 걸어야 할 길이다.
독자와 시청자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순간의 분노를 시원하게 풀어주는 기사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는 글을 선택할 수 있다.
SNS에서 떠도는 자극적인 정보 앞에서 바로 공유 버튼을 누르기보다 한 번 더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작은 습관들이 모이면, 언론이 다시 중심을 향해 돌아서는 힘이 된다.
나는 가끔 상상해 본다.
만약 오늘의 뉴스가 조금만 덜 자극적이고, 조금만 더 맥락을 설명해 주고, 조금만 더 질문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전해진다면 어떨까? 아마 세상이 단번에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덜 흥분하고, 조금 더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중용』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말한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지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중(中)과 화(和)가 이루어지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중과 화’를 사회 안에 채워 넣는 일이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빈 공간을 채우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를 줄이며, 사실과 해석 사이에 조용한 다리를 놓는 일이다.
언론이 중심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언론을 바라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어쩌면 중용의 언론은 거창한 개혁이 아니라 하루 한 번, 내가 무엇을 클릭하고 어떤 시선으로 뉴스를 읽을지 결정하는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극단의 시대일수록
더 큰 목소리보다 더 깊은 균형이 필요하다.
언론이 그 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도 다시 한 번
자신의 중심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