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중용의 길_1부_극단의 시대』 일곱 번째 글
요즘 세상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단어 중 하나가 ‘공정(公正)’이다.
정치도, 사회도, 교육도 모두 ‘공정’을 말한다.
사람들은 공정한 세상을 원하고, 공정한 경쟁을 외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공정을 외칠수록 세상은 더 불공정해지는 듯하다.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모두가 억울하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공정의 역설(逆說)이다.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에서 이렇게 말했다.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화야자, 천하지달도야ㅣ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는 천하에 두루 통하는 길이다.”
공자의 이 말은 지금의 공정 논란에 그대로 적용된다.
진정한 공정은 단순한 ‘균등’이나 ‘평등’이 아니라,
조화(和) 와 중심(中) 을 잃지 않는 균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공정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올바른 중심을 잡는 것이 공정이다.
오늘날의 공정은 너무나도 숫자와 기준에 매여 있다.
시험 점수, 스펙, 경쟁 순위가 공정의 척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숫자로만 환산될 수 없다.
누군가는 출발선이 다르고, 누군가는 넘어야 할 벽이 더 높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룰’만을 외치며
다른 사람의 사정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공정을 향한 외침이 오히려 불공정의 무기가 되어버린다.
『중용』의 저자 자사(子思)는 이렇게 말했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이 말은 인간의 감정뿐 아니라 공정의 본질에도 적용된다.
중(中)이란 감정이 치우치지 않은 상태,
즉 판단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고,
화(和)는 그것이 세상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상태다.
진정한 공정은 바로 이 두 가지 조건이 함께 있을 때만 완성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공정은 대부분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
분노가 쌓이고, 불신이 번지며,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불공정’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그래서 공정의 기준이 감정마다 달라지고,
결국 누구의 공정도 세상의 공정이 되지 못한다.
일례로, 대학의 장학금 제도에 대해 토론을 한다고 하자.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성적이 높은 학생이 장학금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반박했다.
“공정이라면, 가난한 학생에게 더 기회를 줘야죠.”
그때 교수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두 사람 모두 공정을 말하지만, 서로 다른 기준에서 보고 있군요.
진짜 공정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균형 잡혔는가’입니다.”
공정이란 결국 균형의 문제였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이렇게 말했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는 조화롭되 같지 않고, 소인은 같되 조화롭지 않다.”
이 말은 지금의 ‘공정’ 논의에 그대로 닿는다.
진정한 공정은 모두를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름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며,
소인은 같음을 강요한다.
오늘의 사회가 공정을 말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불신과 분노로 가득한 이유는
‘조화’ 없는 공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SNS를 보면 공정에 대한 분노가 매일 쏟아진다.
‘저 사람은 특혜를 받았다’, ‘저건 불공정하다’는 말들이 넘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진짜 공정을 향한 고민보다는
‘내가 손해 보지 않아야 한다’는 심리가 더 크다.
결국 공정의 이름으로 타인을 비난하면서
스스로 또 다른 불공정을 저지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정의 역설이다.
『중용』은 인간의 모든 판단이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인정하되, 그 감정이 절도(節度)를 잃지 않도록 다스리라고 말한다.
공정 역시 마찬가지다.
분노와 정의감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절제되지 않으면 새로운 불균형을 낳는다.
공자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을 이렇게 요약했다.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성자, 천지도야; 사성자, 인지도야)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道)요,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다.”
즉, 공정은 제도나 규칙 이전에 성실(誠) 의 문제다.
하늘의 질서처럼 자연스러운 진실함,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공정은 비로소 살아난다.
그 성실이 사라지면, 아무리 정교한 제도도 불공정해진다.
『중용』에서 말하는 중(中)은 마음의 중심을 뜻한다.
즉, 어떤 판단이든 마음이 흔들리면 이미 중용을 잃은 것이다.
세상에서 진정한 공정을 세우려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이 중심을 되찾아야 한다.
공정이 제도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공정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결과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황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결과를 찾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진실하고 성실할 때,
비로소 공정은 신뢰로 이어진다.
『중용』의 마지막 문장처럼,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지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중(中)과 화(和)가 이루어지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
공정 역시 중(中)을 잃지 않을 때,
비로소 화(和), 즉 사회의 조화로 이어진다.
그 중심이 흔들리면, 정의는 쉽게 분노로 변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가 자행된다.
진짜 공정이란 싸움이 아니라 이해이며,
심판이 아니라 조화다.
공정의 이름으로 서로를 재단하기보다,
서로의 자리와 사정을 바라보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중용의 공정,
그리고 인간다움의 시작이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