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중용의 길_1부_극단의 시대』 여섯 번째 글
요즘 뉴스의 대부분은 돈 이야기로 가득하다.
누가 얼마를 벌었고, 누가 손해를 봤는지,
부동산과 주식, 환율과 금리, 모든 것이 ‘부의 양극화’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더 깊고 위험한 양극화를 느낀다.
바로 인식의 양극화, 즉 ‘세상을 보는 눈’의 분열이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희망’으로 보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세상을 ‘절망’으로 본다.
같은 현상을 놓고도 누군가는 ‘기회’라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위기’라 말한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은 사라지고,
사람마다 자신만의 세상 속에 갇혀 살아간다.
이제 우리는 부의 격차보다 인식의 격차가 더 위험한 시대에 있다.
돈의 차이는 노력으로 줄일 수 있지만,
생각의 차이는 대화가 단절되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는 천하에 두루 통하는 길이다.”
공자의 이 말은 단순한 도덕 교훈이 아니다.
그는 이미 인간의 인식이 편향될 때,
세상 전체가 불안정해진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중(中, 중심)은 마음의 균형이고,
화(和, 조화)는 관계의 균형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 두 균형을 모두 잃고 있다.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지금 세상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까, 나빠졌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는 언제나 두 부류의 답이 있다.
한쪽은 기술의 발전과 기회의 확대를 말하고,
다른 쪽은 인간의 소외와 경쟁의 심화를 말한다.
두 대답 모두 틀리지 않다.
다만 문제는 서로가 상대의 시선을 틀렸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인식의 양극화다.
서로 다른 경험과 정보 속에서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는 사회.
그곳에는 더 이상 ‘공유된 현실(shared reality)’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대화는 단절되고, 신뢰는 무너진다.
『중용』에서는 이런 상태를 “失其所中(실기소중)”이라 했다.
즉, “자기의 중심을 잃는 것”이다.
사람이 중심을 잃으면 감정이 흔들리고,
사회의 중심이 무너지면 가치의 기준이 사라진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의 본질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균형’이 무너진 문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은 사실보다 ‘느낌’이 중요해요.”
그 말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그 말이 우리 시대를 정확히 설명한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내가 느끼는 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이 바로 인식의 양극화가 깊어지는 이유다.
공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성자, 천지도야; 사성자, 인지도야)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道)요,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道)다.”
여기서 誠은 단순한 정직이 아니다.
‘자기 내면의 진실과 외부의 인식이 하나로 일치된 상태’를 뜻한다.
즉, 마음과 생각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 상태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고,
겉으로는 타인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확신을 지키려는 경우가 많다.
결국 ‘성(誠)’이 무너진 사회는 신뢰를 잃는다.
진실보다 이미지가 중요해지고,
깊은 성찰보다 빠른 판단이 앞선다.
그 결과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지만,
서로 다른 세계를 보고 있다.
나는 오래전 농촌 컨설팅을 하면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농민 한 분이 말했다.
“요즘은 스마트농업이 대세라는데, 나는 그게 무섭소.”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대답했다.
“무섭다뇨, 그게 살 길이에요.”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들이 다투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식의 간극이었다.
한쪽은 과거의 안정 속에서 미래를 두려워했고,
다른 쪽은 변화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다.
결국, 문제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의 ‘중심’을 보지 못한 데 있었다.
『중용』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발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이 말은 감정뿐 아니라 인식에도 적용된다.
세상을 바라볼 때, 감정이 아직 흔들리지 않은 상태가 ‘중(中)’이고,
그 인식이 절제되고 조화를 이룰 때가 ‘화(和)’다.
즉, 인식의 중용(中庸)이란
‘한쪽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시선’이다.
요즘 사람들은 ‘내가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중용은 말한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시선의 조화 속에 존재한다고.
그 조화를 잃으면 세상은 갈라지고,
결국 서로 다른 현실 속에서 살게 된다.
이런 시대일수록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대화는 생각을 바꾸기보다, 마음을 열게 한다.
중용은 바로 그 열린 마음에서 시작된다.
나와 너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사이의 공간에서 의미를 찾는 것.
그것이 ‘인식의 중용’이다.
『중용』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지중화, 천지위언, 만물육언)
“중(中)과 화(和)가 이루어지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
이 문장은 단순히 자연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인식이 균형을 되찾을 때,
세상의 질서와 관계가 회복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더 깊은 이해, 더 넓은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균형 잡힌 인식이다.
부의 양극화는 사회를 분열시키지만,
인식의 양극화는 인간을 고립시킨다.
따라서 중용의 길은 단순히 경제적 균형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사유의 균형’을 세우는 일이다.
결국 진정한 부(富)는 지갑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그 마음이 중심을 잃지 않을 때,
세상은 다시 조화로워진다.
그리고 그 조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사는 지혜’를 되찾는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