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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극단사고의 위험, 왜 이분법에 끌리는가?

『진정한 중용의 길_1부_극단의 시대』 다섯 번째 글

by 멘토K


이게 바로 오늘날의 가장 위험한 현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Virtue is the mean between two extremes.”
“덕(德)은 두 극단 사이의 중용(中庸)에 있다.”

그가 말한 ‘The Mean’은 타협이 아니라 균형의 미학이다.


용기(勇氣)는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의 중용이고,
절제(節制)는 방탕함과 금욕 사이의 중용이다.


즉, 덕이란 어느 한쪽의 완벽함이 아니라,
양쪽을 이해한 뒤 스스로의 중심을 세우는 과정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 과정을 너무 싫어한다.
“생각이 길면 손해다”라는 말이 있다.


빠르게 결론을 내야 하고, 즉각 반응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깊은 사고보다 단순한 감정에 의존한다.


그게 바로 이분법이 주는 달콤한 유혹이다.

하지만 이분법적 사고는 결국 관계의 파괴로 이어진다.


나는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결국 ‘우리’와 ‘그들’로 세상을 나누게 된다.


SNS는 그 경계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모이고,
다른 생각은 차단한다.


그 안에서 확신은 커지고, 공감은 줄어든다.
결국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중용』에서는 이런 상태를 “失其所中(실기소중)”이라 했다.
즉, “자기의 중심을 잃는 것”이다.


중(中)은 단순히 가운데가 아니라
‘마음의 평형’과 ‘생각의 균형’을 뜻한다.


중용을 잃는 순간, 사람은 외부의 소리에 흔들린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면, 마음의 중심은 결국 무너진다.

균형 잡힌 신념은 세상에 흔들리지 않지만,
극단의 확신은 언제나 무너진다.

공자는 『중용』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것들이 발하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즉, 감정의 균형이 곧 인간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감정이 ‘논리’보다 앞선다.


감정이 과열된 사회는 이성의 균형을 잃는다.
사람들은 논쟁을 ‘이기려’ 하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 사라진 세상의 징후다.



『중용』의 저자 자사(子思)는 중용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教.”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이 부여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그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즉, 인간의 본성(性)은 이미 하늘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성적 사고, 감정적 공감, 그리고 도덕적 판단은 원래 조화롭게 존재한다.


그러나 극단적 사고는 이 조화를 깨뜨리고,
그 결과 인간은 본래의 ‘성(性)’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상담이나 멘토링을 하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저 사람은 완전히 틀렸어요.”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틀림보다 ‘다름’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다름’을 견디지 못할 때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다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름을 품는 것이 바로 중용의 힘이다.

공자는 군자(君子)를 이렇게 정의했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는 조화롭되 같지 않고, 소인은 같되 조화롭지 않다.”


군자는 생각이 달라도 조화를 이룬다.
소인은 겉으로 같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화한다.


이 말은 오늘날의 사회에도 그대로 통한다.


진짜 성숙한 사회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사회다.

나는 믿는다.
중용은 잃어버린 시대의 해답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가 다시 돌아가야 할 정신의 중심이다.


이분법의 편리함 대신 복잡함을 견디고,
극단의 확신 대신 사색의 여백을 품는 것.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움을 되찾는다.

중용(中庸)은 ‘중간’을 택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보는 눈’을 키우는 일이다.


이분법의 경계 너머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진정한 균형이며,
그것이 중용의 길이다.

- 멘토 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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