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보람과 기쁨이 있다면 견뎌라
한국에서 지낼 때 선생님 복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저 사람은 참 괜찮은 좋은 선생님이구나를 경험한 적이 없던 나는 대학에서 너무 좋은 스승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그중에 한 분이 최근에 돌아가신 나의 멘토이자 친구이자 아버지 같았던 Joe다. (그를 기억하기 위에 나는 브런치에 "당신을 향한 나의 애도"라는 글을 썼다.) 그런 좋은 스승들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막연하게 대학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강사 혹은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면 내 안에 내재된 억울함 혹은 컴플랙스가 조금은 풀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2008년 8월의 끝자락에 첫 강의를 시작했다. 20대 때의 방황은 대학을 7년 동안이나 다니게 하였고 2년의 대학원 생활은 어서 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만들어냈다. 그 압박감은 부지런히 여러 학교에 원서를 넣게 하는 기특함을 발휘했고 그 덕에 나는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바로 대학에 강의를 하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첫 학교에서 수업 하나당 3000불도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곳으로 출근을 했다. 배보다 배꼽이라고 출근에 쏟는 시간과 기름값을 생각하면 당장에 때려치워야 하는 직장이 맞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또 쉽게 얻은 직장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 막 시작이니까 끝까지 열심히 하기로 했던 마음이 컸다.
돈을 번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물론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단 한 번도 돈을 안 벌었던 순간은 없었다. 나는 몇 년 동안 뷰티 서플라이에서 흑인들에게 머리를 팔았고, 백화점에서 액세서리를 판매하기도 하고, 음식점에서 웨이트리스로, 캘러리 어시스턴트, 대학원 사무실에서도 일하며 동시에 교수님 TA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돈을 버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학생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일을 하고 밥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은 부담 그 자체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작가로서의 삶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쪼개서 전시도 했을 만큼 열정 있게 살았다.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하지 못할 일들을 그때는 젊어서 열정이 있어서 해낼 수 있던 시간들이었다.
돈을 쳐 부어도 제대로 된 직장하나 잡기 어려운 미대를 나와서 가난한 신학생을 만나 결혼을 했던 난 너무 순진했던 걸까? 다른 전공을 했다면 좀 더 벌이가 나은 직장을 다닐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적어도 목사가 아닌 다른 직업군의 남자를 만났으면 정신적으로 좀 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내가 내린 결정에 그 어떤 후회도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의 선택이니 믿고 가야 한다. 어이없게도 너무 힘듦에도 불구하고 나를 꼭 붙잡았던 생각은 이게 끝이 아니라 매번 더 좋아질 거라는 근거 없는 긍정적인 믿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신앙의 밑바탕이던 것 같다.
한국어가 훨씬 편한 내가 영어로 강의를 하자 어떤 학생들은 매우 무례하게 굴곤 했다.
당시 나는 유일한 한국인/동양인 강사였고 내가 가르쳤던 첫 학교는 시골 백인 동네 소위 레드넥이 즐비한 깡촌이었으니 그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나는 매우 훌륭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매 학기 있다)
아놔 저런 것들한테 내가 무시를 당해야 해?
첫 몇 학기는 돈도 못 버는 것도 서러운데 날 무시하는 몇몇 학생들에 의해 욱하고 서러움과 노여움이 올라오곤 했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울기도 많이 했지만, 이제 시작 아닌가. 난 정말 인내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 자리를 지켰다. 징징거리면서 내 스승들에게 연락을 하면 그들은 웃으면서 "나도 그랬어! 처음은 원래 힘든 거야. 나도 많이 울었다"라고 나를 위로해 줬다.
지옥 같은 시간이 딱 3년 지나가니 더 이상 지옥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영어로 가르치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부담되지만 (지금도!) 또 할만해지고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물론 무례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들은 나를 단련시켰다. 그들의 무례함은 두리뭉실했던 나의 성격을 매우 세밀하고 날카롭게 다듬으며 나만의 무기를 만들어 무례함과 맞설 수 있게 했다.
닥치면 한다.
이게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된 건 세상에 내던져진 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하다 보니 굴러가고 배우고 익히게 된 내 인생의 모든 순간 때문이었으리라.
시골 대학에서 시작된 강의 인생이 17년 차에 접어들었고 이제까지 1500여 명 남짓한 학생을 만났으며 지금은 다운타운 도시 한 복판에 있는 시티 칼리지에서 7년째 가르치고 있다.
17년이 된 지금...
나는 20대 그 싱그럽고 찬라이며 더럽게 힘든 시기를 보내는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미술작품을 가지고 인생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나누는데 열정을 갖게 하였다. 더 이상 미술 작품은 만들지 않지만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글을 쓰고 나누는 것에 더 큰 재능을 가졌다는 걸 발견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때로는 버텨야지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자신 있게 말해줄 깜냥을 갖게 된 시간이기도 하다. 그냥 버티고 견뎌야지만 알게 되고 익숙해지고 익어가는 것들이 인생에는 분명 있다. 그게 무엇이든 내 안에 잔잔한 기쁨과 사랑과 보람을 준다면 그건 버텨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박봉이지만 기쁨 있어서 지금까지 할 수 있는 일...
내게 17년의 티칭은 그런 것이다.
#버텨야한다면 #인내해야한다면 #가치있는일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