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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가 문주원 Jul 15. 2022

엘리베이터, 그림자


한밤 중 아파트 1층에서 멍하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하얀 벽 위를 쓱 지나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 살펴봐도 아무도 없었다. 분명 큰 그림자를 보았는데 그림자의 실체가 보이지 않으니 더 무서웠다. 심장이 몹시 두근거렸다. 긴장을 놓지 못하고 다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을 때 다시 그 그림자가 휙 지나갔다. 그림자가 움직인 방향대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그림자의 주인을 발견했다. 작은 나방이었다. 실제로는 아주 작은 존재가 천장의 노란 불빛과 만나 본래 몸의 수백 배나 되는 착시를 일으킨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쓱 지나가는 그림자를 종종 마주친다. 열에 아홉은 나방이다. 이제는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매번 새롭게 놀라곤 한다. 다만 인생에 쌓인 빅데이터에 기반하여 그림자가 스치는 찰나, 나방일 것임을 빠르게 예측하고, 역시 나방이었음을 확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찾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을 뿐이다.  


공황, 공황장애라는 말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도, 크고 작게 공황 증세가 일어날 때가 있다. 가볍게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정도고, 심할 때는 분명 숨을 쉬고 있어도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증상이 극심하게 발현되었을 시기에는 공복에도 계속 토하기도 했었다. 객관적으로 불안과 공포의 원인을 진단하고 분석하다 보면 사실 별 일이 아니다. 웬만하면 수습이 가능하고, 해결이 되지 않더라도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아는데도 죽을 것 같는 생각이 엄습한다.


같은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전우들도 많이 만났다. 공황장애는 불치 혹은 난치라고 생각했고 꽤 오랜 시간 약을 복용했지만 30대 중반부터는 약 없이도 지내고 있다. 나이가 들 수록 나방의 그림자를 보고 놀란 마음을 가라 앉히는 속도가 빨리진 것처럼 두려움의 그림자가 내 영혼을 스칠 때 그를 몰아내는 속력이 붙고 있다. 날 엄습하는 그림자는 실제보다 수백 배 혹은 수천 배 부풀려진 착시일 뿐이다. 지난 공황의 낮과 밤들을 복기해보면, 그 밤과 낮은 언젠가는 끝이 났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이 어느새 사그라드는 순간이 있음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산 근처로 이사를 왔더니 사계절이 나방의 계절이다. 어두운 밤, 내 귀갓길을 밝히는 조명이 있으니 그들의 그림자도 춤을 추는 것이다. 어쩌면 때때로 내 삶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내 삶을 비추는 빛 또한 여실히 존재한다는 역설적인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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