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국화(菊花)의 계절입니다. 가을 국화는 쌉싸름한 향기가 그윽하고 모양도 수수한 꽃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가을꽃입니다. 가을꽃으로 국화 말고도 산과 들에 피어 있는 야생국화, 즉 들국화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노래 가사에도 들국화는 많이 나옵니다. 사실상 가을꽃의 여왕은 국화가 아니라 들국화에 자리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곳곳에 많이 피어나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가을 들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모습으로 피어나는 들국화, 그러나 정작으로 식물도감에는 들국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을의 산과 들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모양과 빛깔의 국화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쑥부쟁이, 개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왕고들빼기, 참취, 해국들과 같은 두상화(머리 모양 꽃)들입니다. 두상화란 둘레에 길게 나 있는 혀꽃과 가운데 모여있는 작은 통꽃 두 가지의 종류가 모여 큼직한 한 송이의 꽃처럼 보이는 꽃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들국화 가운데서도 최고의 대접을 받는 꽃은 가을에 가장 아름답게 피는 구절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구절초는 위 사진에서 보듯이 흰색과 연분홍색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들국화 가운데서도 가장 정결하고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수줍은 듯하면서도 해맑은 모습으로 피어나 있는 것과 같이 보이기도 하고, 예전에 흑백사진에서 보던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은 청순하고 소박한 산골 처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새벽녘 문 앞에서 자식 공부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제 어머니의 모습같이도 보여 더욱 애정이 많은 꽃입니다. 가을바람에 산들거리며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그리움과 서러움을 머금고 피어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중양절이라 부르는 음력 9월 9일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는 뜻의 ‘구(九)’와 중양절의 ‘절(節)’, 혹은 꺾는다는 뜻의 ‘절(切)’자를 써서 구절초라 부르며. 식물 전체에서 짙은 국화 향기가 납니다. 요즘에는 공원이나 아파트 조경을 위한 관상용으로 많이 심거나 지자체마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구절초 테마공원>을 조성한 곳도 많습니다. 그만큼 도시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꽃은 식용하거나 차로 달여 마시기도 합니다. 민간이나 한의학에서는 약재로도 많이 사용하여 부인병이나 감기, 성인병 예방 등에 효능이 있다고도 합니다.
공원을 걷거나 공원의 야트막한 뒷산, 혹은 아파트 단지를 걸으며 구절초를 만나면 이 꽃에 이끌려 걸음이 느려지거나 걸음을 멈추고 꽃과 눈을 맞추며, 결국에는 주저앉아 마음마저 내어주고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바라보곤 합니다. 이런 제 마음을 잘 표현한 사람이 ‘꽃의 시인’ 조병화입니다. 특히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라는 구절을 반복해서 읊조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찌 이리도 꽃을 보는 마음이 나와 같을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너에게 끌려,
지나가는 길 멈추곤 한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너에게 끌려,
지나가는 길 흔들리곤 한다.
곱디고운 너의 모습
내 가슴에 가득히 배어들어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너에게 끌려,
지나가는 길 나른해지곤 한다.
아, 이 이승에 하고많은 꽃들이 있지만
그저 너에게 끌려,
황홀한 이 가슴 더욱 환해져서,
지나가는 길 어두워지곤 한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바람에 살랑거리는 너의 볼웃음
늦은 가을 저녁 이 노을에
너에게 끌려, 너에게 끌려,
지나가는 먼 길,
되돌아보고 되돌아보곤 한다.
- 조병화, <작은 들꽃 3>
구절초는 많은 시인의 가슴에서 가을의 노래로 탄생했습니다. 구절초는 가을꽃이 아니라 아예 가을의 시(詩)가 되었습니다. 조병화와 더불어 꽃에서 빠지지 않는 시인이 김용택입니다. 그는 구절초는 가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에 말에 따르면 구절초는 시작과 끝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꽃입니다. 구절초가 피면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시작되고, 구절초가 지면 가을이 끝나고 매서운 추위가 닥쳐 겨울이 시작됩니다. 모든 꽃의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가 꽃을 보며 찾아내는 의미와 통찰은 놀랍기만 합니다.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 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넘어
서늘한 저녁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 김용택, <구절초꽃> 전문
구절초가 피어야 가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구절초를 보면서 비로소 우리는 가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을을 닮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탐욕을 모두 버리고 순수하고 가을의 기다림과 그리움을 배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절초의 향기를 맡고 온몸에 구절초의 향기를 묻혀 가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박기섭은 구절초 차를 마시며 ‘비로소 가을 소식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구절초를 통하여 가을의 시작을 알 수 있다는 의미지요.
찻물을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음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잔을
올립니다.
-박기섭, <구절초 시편> 전문
김용택 시인의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다른 시인이 있습니다. 이병금은 그의 시 <가을 점등(點燈)>에서 저녁 풀 섶 가에 피어나고 있는 구절초가 ‘새 가을의 등불을 밝히고 있다’라고 합니다. 마른 잎새들이 바람 치는 절벽에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떨고 있을 때, 내 가슴에 노을빛 내려 어루만질 저녁 어스름에 구절초는 가을을 알리는 불빛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가장 기뻐하며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구절초의 계절, 가을이 온 것입니다. 구절초를 보는 제 마음은 몹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야트막한 꿈 언덕을 헤매며
네잎클로버의 시 한 줄을 찾고 있었다.
말의 바퀴들이 나를 싣고
생각이 끊어진 그 고개 너머까지
데려가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햇살오리가 바다 물결을 엮어가는 그곳으로
마른 잎새들이 바람 치는 절벽에서 떨고 있을 때
내 가슴의 지평선을 노을빛 내려 어루만질 때
구절초 몇 송이 저녁 풀 섶 가에 피어나고 있었다.
새 가을의 등불 밝히고 있었다.
- 이병금, <가을 점등(點燈)>
가을의 끝자락에 다다르면 구절초는 사위어 가고, 지나가는 가을의 옷자락에 붙들고 서서 해쓱한 얼굴로 계절이 마침이 아쉬워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구절초는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가을이 가면 저 산들거리는 바람에도 제 목숨이 끊어질 듯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도 구절초처럼 다가오는 겨울이 고통의 계절이요, 죽음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진정 가을의 끝은 무엇일까요? 이해인 수녀님의 통찰은 매우 현명하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의미가 가슴을 울립니다.
정말로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라고 한 이해인 수녀님의 <꽃씨를 닮은 마침표처럼>과 같이 구절초가 피었다 지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우리에게 따스한 위안을 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 줍니다. 구절초의 계절이 가고 겨울이 온다 해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씨앗에서 시작하여 씨앗으로 끝난다.’라는 사실입니다. 꽃은 어찌 보면 단지 씨앗을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결국엔 구절초꽃이 가을의 시작을 알려 주고 꽃씨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못 견디게 힘든 때에도
다시 기뻐하고
다시 시작하여
끝내는 꽃씨를 닮은 마침표 찍힌
한 통의 아름다운 편지로
매일을 살고 싶다
- 이해인, <꽃씨를 갊은 마침표처럼> 마지막 연
김용택 시인도 그의 시 <산>에서 ‘연보라색 구절초 곁을 지날 때 / 구절초꽃은 이렇게 말했네 / 인생은 한 번 피었다가 지는 꽃이야 / 너도 나처럼 이렇게 꽃 피어 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절초가 비록 짧은 가을 한 철 피다가 지나가는 꽃인 것처럼 우리 인생도 한 번 피었다가 가는 것입니다. 구절초처럼 화려하게 진한 향기로 피었다가 가을을 밝히고 사라지면 꽃씨를 닮은 마침표를 가져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구절초의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가을의 시작과 동시에 가을의 끝을 알리고 겨울을 이어주고 소멸해가는 구절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흰 저고리에 흰 치마를 두른 예전의 우리 어머니 같은 꽃이 구절초입니다. 봄의 상큼한 향기와, 여름의 화려한 색깔과, 가을의 풍성한 결실을 떠나보내고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떠나는 꽃입니다. 지난날 우리네 어머니의 아픔과 그리움을 담아내는 꽃이 바로 구절초입니다. 정연복의 시 <들국화> 끝부분에 보면 이런 구절초의 표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찬 서리와 이슬 머금고 / 더욱 자기다운 꽃 // 한철 다소곳이 살다 지고서도 / 그리운 여운이 남는 // 인생의 누님 같고 / 어머님 같은 꽃”이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유난히 고운 구절초가 피었습니다. ‘날개가 없어 별이 되지 못한 눈물 같은 꽃’ 구절초가 피어서 산 너머 흰 구름만 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구절초’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그해 가을처럼 새하얀 구절초가 피었습니다
날개 고운 산새가 울고 간 그 자리
눈이 커 잘도 우는 그 아이처럼
산 너머 흰 구름만 보고 있는 꽃
올해도 그 자리에 새하얀 구절초가 피었습니다
날개 없어 별이 못된 눈물 같은 꽃이
- 선용 작사 / 진동주 작곡, <구절초>
<뱀발>
앞에 언급한 김용택의 시 <구절초꽃>의 마지막에서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라고 했지만 보통 소쩍새는 봄밤에 서럽게 웁니다. 구절초가 피는 가을보다는 애잔한 봄밤에 어울립니다. 소쩍새는 죽을 때에 가장 구슬프고 슬픈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다만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봄밤의 애잔한 소쩍새 울음이 죽음의 계절인 가을로 치환됐다고 생각합니다. 꽃의 죽음을 맞이하며 그리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