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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Oct 01. 2022

상사화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슬픔을 알아줍니다

요즈음 날마다 나오는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는 ‘연애 폭력’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협하고 해악을 끼치며 더 나아가서 살해하기까지 하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옵니다. <청평사와 상사뱀> 설화에 보면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뱀이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상사병으로 죽은 상사뱀은 상대방을 끝까지 쫓아와 괴롭힙니다.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 본인도 괴물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도 슬픔에 빠져 죽게 만드는 설화가 오늘날 우리 눈앞에 되살아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현상이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느닷없이 홧김에 이루어지기까지 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된 세상입니다. 우리 사회가 변하여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 아니라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이라고 한 어느 분의 한탄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떻게 해야 현명한 이별을 해야 할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안고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들의 애틋한 사랑이 이런 험악한 사회현상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짝사랑이 깊으면 병이 됩니다. 상사병이라고 하지요. 꽃 가운데 상사병에 걸린 꽃도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있으니까 제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있겠지요.  

    

다른 풀꽃과는 달리 잎이 다 진 후에 느닷없이 긴 꽃대가 올라와 분홍색의 나리(백합)와도 같은 꽃을 피우는 꽃, 그래서 잎과 꽃이 함께 하지 못하는 꽃이 상사화입니다. 이 꽃은 절대로 살아서는 만날 수 없다는 숙명적인 이별의 아픔, 그래서 죽어서라도 만나고자 하는 안타까움으로 학의 목처럼 길게 줄기를 올려 이루지 못할 사랑을 아파하듯이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너무나 슬픈 이름이 이 풀꽃에 주어졌습니다. 상사화의 꽃말은 ‘운명’이라고 합니다. 남부지방 절가에 무수히 피어난 꽃무릇(석산)을 상사화라고도 부르지만, 꽃무릇과는 엄연히 다른 꽃입니다. 물론 꽃무릇도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꽃무릇도 상사화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엄격히 말하자면 꽃무릇은 상사화와는 다른 꽃입니다.  

석산(꽃무릇)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상사병은 아니더라도 첫사랑의 열병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었을 겁니다. 요즈음엔 초등학생들도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만들고 손을 잡고 다니는 학생들도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시절이었습니다. 무척 좋아했는데 그 마음을 아셨던지 담임 선생님이 그 여학생과 짝꿍을 만들어 주셨습니다만, 좋아한다는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반대의 행동으로 나타나 괜히 싸우고 그랬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추억 속에서 금세 떠올리겠지만, 당시의 책상은 두 명씩 앉던 책상인지라 칼로 책상 가운데 선을 그어서 짓궂게 영토분쟁을 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갈 때면 그 여학생 집을 한 바퀴 돌고 지금쯤 일어났겠지 생각하며 갔고, 하교 후에는 일부러 늦게 나와 마찬가지로 또 한 바퀴 돌아가곤 했습니다. 속으로만 애를 태우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6학년이 되어서 먼 지방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은 저에게 상사의 열병을 앓게 했고, 그 열병에서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볼 수 없는 그리움으로 대체되었지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은 한 번쯤 이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식물이건 꽃을 피워낸다는 일은 엄청난 노력과 온 마음과 온몸을 다해서 힘을 쏟아부은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상사화는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무성화입니다. 어찌하여 상사화는 열매도 맺지 못하면서 저리도 순수하고 곱디고운 꽃을 피워내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해서 상사화가 꽃을 피우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까요? 아무런 이유 없이 피는 꽃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피어난 꽃은 반드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상사화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무성화이지만, 비록 마음속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사랑처럼 이루어지지 못할 줄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꽃을 피웁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저리 고운 상사화의 슬픔을 알아줄 것입니다. 독일의 대표 작가인 괴테는 그런 마음을 담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알아줍니다.

홀로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등지고

멀리

하늘을 바라봅니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지금 먼 곳에 있습니다.

눈은 어지럽고

가슴은 찢어집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알아줍니다.      

  - J. W. 괴테,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는 유럽을 휩쓴 18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소설가입니다. 그가 살았던 낭만주의 시대에 유럽의 청년들 사이에 자살 증후군까지 불러일으켰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은 베르테르라는 청년이 어느 마을의 무도회장에서 멋진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인 로테를 만나면서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지만,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 권총으로 자살을 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772년에 괴테는 업무상 베츨라르에 머물며 요한 케스트너라는 새 친구를 사귄다. 케스트너에게는 샤를로테 부프라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괴테는 첫눈에 반해 그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괴테는 얼마 뒤에 한 친구가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자살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이 소재에 자신의 체험을 섞어서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괴테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하루아침에 유명 작가가 된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사랑도 병이 될 수 있을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이 빠져들어 그 사람을 안 보면 죽을 것만 같고, 생각만 해도 행복에 겨워하는 상상에 빠지곤 합니다. 사랑이 남기는 것은 추억만이 아닙니다. 상사병이라 불리는 마음의 열병도 함께 남깁니다. 지워지지 않는 짙은 자국을 남겨놓고 가끔 한 번씩 되살아나면서 행복한 단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갖게 만듭니다. 언젠가는 그리움의 말을 전하기 위해 상사화는 자신의 몸 안에 그리움을 키웠습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 피울 때마다 그리움이 응어리졌을 것입니다. 응어리가 변하여 꽃으로 환생했습니다.

         

불치의 내 상사병

백 년 세월에도 못 고치는 만성질환이

죽을 죄로 부끄럽습니다

철커덕 철커덕 철로 위를 달리는

무쇠 바퀴 한 틀도

더러는 멈추었다 가련만

원수 같은 상사병은

나 죽은 후에도     

심장이 살아남아 두근두근

맥박치면 어이 할까요     

아닙니다

생손톱 하나 뽑아 피 묻은 그대로

그 사람의 속주머니에

넣어 보내지도 못했으니

참 상사병이나마 되겠는지요

그저 아득합니다

아득합니다     

  -김남조, <상사병> 전문  

        

김남조 시인의 <상사병>이라는 시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백 년 세월에도 고치지 못하는 고질병이 되고, 멈추지 못하고 죽은 후에도 멈추지 않고 맥박친다.’ 하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그 사람 죽는 그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보내던 그날, ‘생손톱 하나 뽑아 피 묻은 그대로 그 사람의 속주머니에 넣어 보내지도 못했다.’라는 참된 상사병조차 되지 못했다는 한탄이 우리를 처연하게 합니다. 여기서 김남조의 <상사병>은 자연히 황진이의 시조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하고 읊은 황진이의 시조가 연상됩니다.  

   

황진이는 상사병으로 죽은 이를 위하여 인생을 바꾼 대단한 여인이지요. 자신을 짝사랑하여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의 시신 위에 속옷을 벗어 덮어줌으로써 조선 중기 여인들에게 덧씌워진 숨 막히는 인습과 정조의 굴레를 벗어던진 용감한 여인입니다.

    

신윤복의 미인도(황진이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있음)

황진이는 1516년 황해도 개성에서 황 진사와 그의 첩이었던 진현금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딸을 양반의 자제처럼 키웠습니다. 10살 무렵 사서삼경을 다 뗄 정도로 영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외에도 시(詩)와 가야금 병창에도 뛰어났습니다. 17살 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동네 총각이 말을 못 한 채 황진이를 그리워하다 그만 상사병으로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황진이의 집 앞으로 그의 상여를 돌아가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그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려고 하자 상여가 꼼짝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문 밖이 소란하여 그 사연을 전해 들은 황진이는 그를 동정하며 자신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었는데 거짓말같이 상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도 말 한마디 못한 그 총각이 하도 가여워 다시는 시집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치마를 덮어 준 것은 자신의 죽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의미가 된 것이지요. 그 후 황진이는 결혼하지 않았고 기생이 되어 뭇 남성들을 울리고 웃기고 때로는 죽게 만들지요. 한 남자의 상사병으로 인한 죽음이 남존여비의 봉건사회에서 여성의 권위를 높이고 우리 문학사에서 한 위대한 여류시인을 탄생을 이루어낸 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첫 직장 다닐 때 창 너머 화단에서 매년 불쑥불쑥 피어나는 분홍색 상사화를 보며 그리움을 알게 되고는 직장을 옮기면서 아쉽게도 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해 여름 온 가족이 서해안 따라서 남도 여행할 때 신안 보물선 카페 앞에서 다시 만나 너무나 기쁘게 했던 상사화(相思花).  

    


우리 동네에선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안타까웠는데 올여름 근처 음식점 울타리 관목 사이에 숨어있던 분홍색 상사화를 보고는 울컥했습니다. 관목을 헤쳐 보니 온전하고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상사화는 알뿌리를 가진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일반적으로 분홍색 꽃이 피지만 흰색, 진노란색, 붉노란색 꽃도 있습니다. 원산지는 우리나라이고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끝으로 이해인 수녀님이 지으신 눈물 나는 시 <상사화>를 꼭 읽어주세요. 수녀님은 우리에게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 이해인, <상사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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