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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Oct 03. 2022

엉겅퀴

비천한 풀에서 추앙받는 영광의 꽃으로

‘하느님은 우리가 가진 가장 비천한 것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위대하게 사용하신다.’ 성당에 다니면서 신부님의 이런 말씀을 가끔 듣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될지라도 언젠가는 귀하게 쓰일 곳이 있으니까 실력을 키우고 마음을 다져 기다려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신부님이 하신 말씀대로, 엉겅퀴처럼 가시만 많고 쓸데없는 꽃도 신께서 위대하게 사용할 수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비천한 꽃을 추앙하고 떠받들기까지도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전설적 영웅 윌리엄 월레스의 일생을 그린 영화 ‘브레이브 하트’ 초반에 한 소녀가 주인공에게 엉겅퀴꽃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보셨습니까? 비교적 척박한 땅인 스코틀랜드에서 아주 흔하게 잘 자라나는 꽃이 엉겅퀴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를 가리켜 사람들은 '엉겅퀴의 나라(The Land of Thistle)'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강대국들 틈에 끼어 있던 스코틀랜드는 주변 강대국인 잉글랜드와 바이킹의 하나인 덴마크계 게르만족인 데인족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이 침략하여 대치하고 있을 때 야음을 틈타 소리 없이 스코틀랜드 진영으로 침공하기 위해 맨발로 전진하였습니다. 그들이 스코틀랜드 진영에 거의 다다랐을 때 엉겅퀴를 맨발로 밟은 군사가 그만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적의 침입을 눈치챈 스코틀랜드 군사들이 빨리 대비하여 데인족을 물리쳤습니다. 그 후로 쓸모없는 비천한 풀인 엉겅퀴는 나라를 구한 꽃으로 추앙을 받게 되고 스코틀랜드의 국화(國花)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 포스터(왼쪽)와 엉겅퀴 꽃을 꺾고 있는 소녀(오른쪽)

한여름에 태양을 향해 없이 두려움 없이 솟아올라 거침없이 꽃을 피우는 꽃들이 여럿 있겠지만 여름을 대표할 만한 꽃이 엉겅퀴입니다. 이름이 왜 하필 엉겅퀴일까요? 사전을 찾아보니 피가 날 때 풀을 짓찧어 붙이면 피가 엉겨 붙어 잘 멈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 풀꽃은 진한 자주색이나 보라색 꽃송이를 피우고, 잎에는 무시무시한 가시들을 달고 있어 두려움조차 느끼게 만드는 모습이 위풍당당한 장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들풀이 그러하겠지만 엉겅퀴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장치로 가시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엉겅퀴꽃에 함부로 잘못 다가가다가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처럼 낭만적인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심해서 가까이 가서 가시를 피해 잎을 만져보면 그 부드러움에 감탄할 것입니다.

    


엉겅퀴는 우리 동네 주변의 공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마을 주변의 뒷동산이나 밭두렁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공원 한구석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엔 망초, 개망초, 명아주, 개여뀌, 강아지풀과 같은 잡초와 함께 어김없이 자라나는 풀입니다. 동물이나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짓밟히면서도 또 일어나 잘 자라기 때문에 백성들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은 엉겅퀴가 가진 ‘복수’나 ‘고독한 사람’의 꽃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을 배경으로 의지할 곳 없는 망명자들의 운명을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베를린에서 큰 병원의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였지만 나치에게 쫓겨 파리의 뒷골목에서 무면허 외과 의사 노릇을 하던 주인공 라비크와,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 했던 떠돌이 가수 조안나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라비크는 따뜻한 인간성과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 의사였지만 비정한 역사의 흐름과 전쟁에 휘말려 견실한 시민생활에서 밀려나 파리 뒷골목에서 허무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라비크를 체포해 고문하고 자신의 옛 애인을 죽게 만든 게슈타포 하아케에 대한 복수를 했지만 허망함에 빠지고 조안나마저 그녀의 남편이 쏜 총에 맞아 죽습니다. 라비크는 복수에 대한 일념으로 조안나와의 사랑을 애써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회만 남고, 파리 하늘에 높이 솟아 있는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의 뒷골목을 냉소 지으며 트렌치코트 깃을 올리고 걸어가는 라비크의 모습은 바로 가시를 품은 ‘복수’와 ‘고독한 사람’이라는 꽃말을 가진 엉겅퀴의 이미지와 완벽히 겹쳐집니다.  

        

영화 <개선문>


엉겅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신은 바로 네메시스입니다. 네메시스는 복수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르키소스는 매우 아름다운 청년으로 많은 젊은이들과 소녀들의 흠모를 받았으나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실연당한 숲의 님프 에코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됩니다. 네메시스는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결국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의 고통을 겪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여 우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꽃이 두 가지입니다. 나르키소스는 죽어서 수선화가 되었고, 헤라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하다 죽은 요정 에코를 위해 프리지어꽃으로 만들어줍니다. 여기까지가 그리스신화의 내용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복수의 신 네메시스는 엉겅퀴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네메시스 조각상


들꽃이거든 가시 돋친 엉겅퀴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친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로 꺾으려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멍울을 보여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

그리고

보랏빛 꽃을 보여주리라

 - 복효근, <엉겅퀴의 노래> 부분  

   

‘엉겅퀴’는 가시가 많아 ‘가시나물’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복효근의 시 <엉겅퀴의 노래>는 이 가시가 많은 꽃을 사랑으로 보고 있습니다. 꽃이 사랑이 되기까지는, 사랑이 꽃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고통이 뒤따릅니다. 복효근은 가시 돋친 엉겅퀴를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함부로 꺾으려는 자에게는 피의 복수가 따르고, 피를 통해서 사랑을 논할 수 있다 합니다. 그래서 피어난 꽃이 보랏빛 엉겅퀴입니다.

    


사실 엉겅퀴는 자세히 보면 꽃술이 참 예쁘지만, 떨어져서 보면 그렇게 예쁜 꽃은 아닙니다. 더구나 무시무시한 가시까지 달고 있어 근접하기 두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엉겅퀴꽃을 예뻐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랏빛의 무거운 색조를 가진 꽃잎은 죽음을 상징하는 색으로 창백하고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윤후명은 동화도 썼습니다. 그가 쓴 동화 제목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입니다. 그가 말한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은 엉겅퀴꽃입니다. 그의 눈에는 왜 엉겅퀴가 가장 예쁜 꽃으로 보였을까요? 동화 속으로 들어가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아무리 애써도 꽃이름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 그러다 그만 울음이 나옵니다. "엉엉엉엉, 겅겅겅겅." … 콧물에 코까지 막힙니다. "퀴퀴퀴퀴." … 무엇인가 머리를 스쳐갑니다. "아, 엉, 겅, 퀴." 나는 기뻐서 눈을 번쩍 뜹니다. "뭘 알아냈니? "그건 엉겅퀴꽃이에요!" "그래. 알아냈구나. 울면서 알아냈으니, 이제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그 꽃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라고 해도 되는 거란다." 나는 드디어 머리를 끄덕입니다.'  

    

아이는 꽃이름을 몰라 ‘엉엉엉~ 겅겅겅~ 퀴퀴퀴’ 울다가 엉겅퀴꽃 이름을 알아냅니다. 울면서 알아내고 잊지 않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 된다고 합니다. 아이의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 꽃을 보면 그때에서야 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이 되는 겁니다. 엉겅퀴꽃처럼.    

       


세상을 살다 보면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속에 엉겅퀴의 가시처럼 돋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때론 시기와 질투가 되기도 하고 때론 미움이 되기도 하고 때론 복수의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가시가 주위 사람들에게 때론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내가 말로 할퀸 상처에서 엄청난 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연 하나쯤, 그런 고통 하나쯤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시련이 사랑으로 귀결되어야만 하겠습니다. 핏방울을 보아야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엉겅퀴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 그리고 희생이 뒷받침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고 엉겅퀴꽃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뱀발>                              

엉겅퀴꽃 사촌쯤 되는 친척들이 많습니다. 꽃이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습니다. 다른 것도 많지만 우리 동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설명만 하겠습니다. 큰엉겅퀴는 키가 아주 크고 꽃이 아래를 향해 있습니다. 지느러미엉겅퀴는 꽃대에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것이 달려 있고 잎끝에 가시가 있습니다. 조뱅이는 잎도 갈라지지 않고 가시도 없어 꽃도 잎도 시골 처녀처럼 순하게 생겼습니다. 지칭개는 조뱅이와 엉겅퀴의 중간쯤 되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꽃술이 날카롭지 않습니다. 산비장이는 엉겅퀴보다 아주 홀쭉하고 날렵하게 생겼고 꽃잎이 성글게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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