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전세탈출 그리고 IMF

우리 가족은 천국과 지옥의 낭떠러지 사이에 서서 발만 동동구를 뿐이었다.

by Hyean de TJ

문민정부로 불리던 김영삼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96년과 1997년은 정말 열대지방과 극지방의 차이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996년에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 95가 설치된 컴퓨터가 학교에도 보급되었고,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가 등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2002년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하기로 확정되면서 우리나라도 뭔가 새롭게 일어서는 선진국 반열에 도달했다는 여러 시그널들이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모두가 희망에 찼었던 해로 기억이 된다.


게다가 우리 집은 지긋지긋한 쥐와 바퀴벌레 소굴이었던 동굴 같은 전세방을 탈출하고 새로 지은 신축빌라로 이사를 갔다. 새로운 집에서 새 출발 하는 그 기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2017년이 되면서 개봉되었던 영화 비트가 인기를 끌며 많은 또래 아이들이 정우성의 오토바이 타는 모습을 동경하였고,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그냥 그렇게 평범하던 어느 날, 나라 안팎으로 매우 불안해지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TV를 보던 중에 흘러나온 한국의 IMF 구제금융 신청 소식은 그야말로 전 국민이 가슴을 부여잡을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1997년 11월 21일 MBC 이인용 앵커는 뉴스데스크 오프닝 멘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 정부가 결국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 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 아픈 처지가 된 겁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가족 모두는 그 뉴스를 보면서 망연자실했고, 아버지와 엄마는 여기저기 아는 곳에 전화를 돌리기 바쁘셨다.




엄마는 참 착실한 사람이었다.

돈을 버는 만큼 쓰지 않고, 늘 덜 쓰고 많이 모았다.

조금씩 더 모으면, 그걸로 다시 더 크게 모으는 재주가 있으셨다.


돈을 많이 버는 능력은 없었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며 돈을 잘 관리하여

물 샐틈 없이 아끼고 알뜰살뜰 모아서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발버둥 치셨다.


지금도 그 오랜 습관을 유지하시며,

부지런히 돈을 아끼고 모아서

자식에게 내어주려 하셨다.


어떻게 모았을지 알기에

그 노력과 정성에 우리 형제는

참 바르게 클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방 안에서 담배를 두 갑 넘게 피우시던 아버지에게 어릴 적 나는 계몽(?)의 의미로 금연 포스터를 직접 그려서 방의 곳곳에 붙여두었는데 그날 나는 재떨이가 내 눈 옆으로 비켜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원래도 아버지는 나에게 약속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고, 나보다는 늘 동생을 아끼셨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기대는 1도 하지 않는다.


마흔이 넘어서도 나는 지금도 아버지와 담배 문제로 티격태격하는데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골방에 붙어있던 벽지는 수개월만에 담배연기가 침착되어 누렇게 변했고, 참다 참다 엄마는 한 소리를 하시다 결국 우리 형제가 보는 앞에서 맞는 모습을 보이시고 말았다.


응급실에 가면서도 "내한테 맞았다는 소리 하지 말고, 저기 다락에서 떨어졌다고 말해라"라는 개소리를 시전 했다는데 엄마는 그 당시를 잊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이모집에서 두 달 동안 계셨고, 나는 동생을 데리고 밥을 챙겨 먹으며 학교를 다녔다.

나 역시도 그때 그 사건은 잊지 못한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른이 되어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해졌다.


그것은 바로 담배 절대 피지 않기와 여자에게 함부로 하지 않기다.


어린 시절 나 스스로 했던 그 약속을 지키려고 나는 군대에서 선임들에게 매일 밤 지포 라이터로 머리를 맞으면서도 참아냈다. 나도 참 그 결기가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그날의 사건으로 돌아가 보면,


지금 같은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형사조치가 취해졌겠지만, 지금은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사건이고 그 당시 아버지와 할머니는 수차례 이모집에 가서 사과를 하였고, 자식들이 불쌍했던 엄마는 다시 그 거지 같은 전세방으로 돌아오셨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엄마는 아버지와 상의 없이 새로 짓는 신축빌라 현장을 찾아가 덜컥 분양계약을 하고 오셨다.


엄마 인생에서는 첫 번째 위대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위대한 발자국을 존경하며 지금도 나의 부동산 투자원칙에 큰 맥으로 삼고 있다.


엄마는 참 대단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세방 1,500만 원에 모은 돈이 라 해봐야 수백만 원이었을 살림이었을 텐데 9,500만 원짜리 신축빌라를 덜컥 계약했으니 앞 날이 캄캄했을 것이다. 취등록세와 이사비까지 계산하면, 정말 눈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런 큰 일을 벌였지만, 자기 잘못이 있었던 아버지는 순순히 받아들이셨고, 부족한 돈을 융통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셨다.


지금이야 LTV 70% 한도의 주택담보대출이 익숙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40~50% 한도의 주택담보대출은 실로 어마어마한 원금과 이자가 들었다. 지금 확인해보니 은행의 신규취급액 기준 가중평균금리는 1996년 11.21%였고 1997년 11.83%, 1998년 15.18%였다고 한다.


지금 기억에 6천만 원은 대출이었고, 2,500만 원은 모은 돈(물론 돌반지, 예물, 패물 등 돈 될만한 것들은 다 처분해서 모아진 돈이었다.)에 지인들에게 빌린 돈이 2천만 원 정도였다.


은행에 돈 100만 원을 맡기면, 금리가 10%였던 시절이니 참 돈 모으는 재미가 있었던 시절에 우리 집은 그 보다 많은 이자를 은행에 갖다 주었으니 얼마나 삶이 고단했을지는 상상에 맡겨본다.


우리 집은 그렇게 어렵게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새 빌라로 이사 간 후로 나는 뭔가 스스로 당당한 마음이 들곤 해서 걸음걸이도 좀 달라졌었는데 늘 쭈글쭈글하게 있다가 다리미질로 확 편 듯한 그 기분은 참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엄마도 분명 나와 같았으리라!


빛도 제대로 들지 않던 방에 살다가 매일 해가 들고, 새소리를 들으며 잠을 깬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을 더없이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은 국가부도를 선언하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IMF 구제금융에 머리를 숙였다.


우리 집도 당장 그 영향이 왔고, 금융지식이 없던 우리 집은 변동금리로 쓰던 대출금리가 20%로 치솟았다. 얼마나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었는지 모른다.


부모님은 악착같이 돈을 아끼며 금리가 높은 대출부터 갚아 나가셨고, 그런 와중에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셨다.


그 이후로 우리 집 형편에 철이 지난 옷 한 벌 사는 일이 정말 특별한 일이 되었고, 사내아이가 한창 크는데 많이 먹이지 못한다며 미안해하셨다.


참 세상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마침 아버지는 부외로 수당이 많이 들어오는 업무로 투입이 되셨고, 그로 인해 우리 집 살림살이는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IMF라는 경제 태풍이 불어오면서 수많은 대한민국의 기업들과 가족들이 실의에 빠졌었다.

우리 가족도 예외 없이 온몸으로 그 충격을 받았고, 또 그 아픔을 이겨냈다.


물론 아주 오랜 기간 그 후폭풍으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했지만

그때의 아픔과 경험은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데 아주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위험이 오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하고,

위기를 맞더라도 버티고 버티다 보면 또 좋은 날이 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득하였다.


그리고 매일 저녁 엄마의 잔업은 늘어났고, 저녁밥도 못 먹은 채 집에 오는 일이 잦았다.

그때 나의 특기는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것이었고, 엄마는 그렇게 늦은 밤에 내가 해주는 김치볶음밥을 기다리며 그렇게도 좋아하셨고, 늘 정말 꿀맛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들! 그때 해준 김치볶음밥 진~짜 맛있었어~!"


지금도 가끔 엄마는 내가 해준 김치볶음밥이 생각난다고 하시니 나는 괜히 눈물이 지어진다.






비바람 막아 줄 우산 하나 없이 태풍을 그대로 맞은 우리 집을 다시 일으킨 것은 엄마였다.


그런 엄마는 자식들 하나만 바라보고 사셨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자식 하나 보고 산다는 말을 쉽게 해도 나에게 엄마는 정말로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셨다.


나는 그 위대한 희생으로 자라났고, 엄마의 소박한 바람과 간절한 기도를 들으며 곧고 바르게 성장했다.



To. 엄마


새벽같이 일하러 나가고 깊은 밤 별을 보며 퇴근하는 엄마가 늘 안쓰러웠어요.

직장생활의 고단함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기에 나이가 들수록 더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자식을 위해 참고 이겨내고 살아낸 엄마의 땀과 눈물이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했습니다.

아직도 엄마의 마음을 다 온전히 이해하진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해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아들이 될게요.

참 고단한 젊은 시절, 버텨줘서 고맙고,

끝까지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엄마!


From.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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