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일은 늘 설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맵고 짜고 단 음식을 좋아한다.
매운 것을 먹으면, 뒷골까지 당기는 매운맛 때문에 스트레스도 풀리고, 달고 짜고 맵기까지 하다면, 인기 메뉴일 가능성이 높다.
혀가 아려오는 매운맛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끝에 오는 개운함과 시원함 때문일까?
우리나라에는 유독 매운 음식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남녀노소 모두 좋아할 음식은 바로 떡볶이일 것이다.
맵고 짜고 단맛을 모두 갖춘 퍼펙트한 음식!
떡볶이!!
어릴 적 학교를 마치고 오는 길에 문방구 옆에 있던 자그마한 떡볶이집에는 늘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손에 꼭 쥐어진 50원이면,
얇고 짧은 떡볶이 2개를 입에 넣을 수 있었고,
아이들은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떡볶이를 먹었다.
돈이 없어 침 흘리며 구경하는 아이들을 보며 하나 남은 떡볶이를 잘라 서로 나눠먹던 정도 있었다.
그게 우정이었고, 다음에는 꼭 너도 나에게 주라는
부채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어쩌다 돈이 여유로울 땐
어묵에 슬러시까지 추가하는 호기를 부릴 수 있었는데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에도 웃음이 지어지던 시기였다.
경제성장이 눈부셨던 시절이었고,
인플레이션 걱정이 없었던 시기였기에
물자는 부족했지만 정이 넘치는 때였다.
그렇게 떡볶이는 배고픔을 채워주고,
사람 사이에 돈독한 관계를 이어줬던 소울푸드였다.
이사를 간 집에서 적응을 해 나갈 때쯤이었다.
그즈음 나는 이제 덩치도 커지며 점차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느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더운 여름날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났었던 그 시절, 집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피서법은 찬물을 받아둔 빨간 고무대야에서 물 한 바가지를 온몸에 들이붓는 일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지만, 뒷골까지 당기는 찬물을 몇 번 끼얹으면 더위는 어느새 잊히곤 했다.
그렇게 나는 내 동생과 둘이서 씻으며 더위를 달랬다.
집에 진짜 어른이 없어도 나는 동생에게 실질적인 어른이자 보호자였고, 나는 그런 나 자신이 스스로 참 대견하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새로 구한 직장으로 옮기신 후로는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그때는 잔업이 늘어나는 날이 많아졌던 것 같다.
엄마는 집에 오신 이후에도 뒷정리를 하고, 늦게 저녁을 차려서 드셨고, 한숨을 뱉어내고서야 밥 한술을 겨우 뜨셨다.
나는 늘 늦게 들어오시는 엄마가 안타까웠고, 밥을 넘기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애가 많이 쓰였다.
엄마는 피곤에 절어 힘이 없지만, 집에 오는 길에 먹을만한 반찬거리를 사서 검은 봉지에 담아 오시고선 다음 날 도시락 반찬에 우리 형제가 먹을 수 있도록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철없게도 나는 그런 엄마의 반찬 만드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고, 고구마 줄기를 볶을 때 솔솔 피어나는 마늘향과 참기름 향을 좋아했다.
나는 점점 클수록 엄마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엄마가 퇴근하기 전에 방청소와 빨래 개기, 동생이랑 씻고 숙제를 해놓는 등의 엄마가 칭찬해 주실 만한 일들을 척척 찾아서 했다.
엄마는 늘 나를 든든해했고, 동생을 잘 돌본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시간이 흘러 동생이 좀 더 크면서 나는 인생 처음으로 육아의 매운 맛을 봤다.
그 맘때 아이들이 다 그렇듯 가만히 있지 못하는 동생은 늘 엄마를 찾았고, 엄마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자고 떼를 썼다.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엄마의 직장에 전화를 걸어
두어 번 그렇게 엄마를 마중 나간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엄마는 지하철역 앞에서 보자고 하셨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는데 몸을 깨끗이 씻고 걸어가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 형제는 지하철역 앞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렸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냥 감으로 사람을 기다렸던 때였고, 그 기다림은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엄마가 내리는 곳은 늘 똑같았지만 여기서 나올까 저기서 나올까 걱정되어 지하철 역을 왔다 갔다 했었다.
그렇게 애타게 엄마를 기다리다 만나게 되면, 엄마는 늘 우리 형제에게 지하철역 앞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실컷 먹게 사주셨는데..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늘 풀떼기 반찬에 된장찌개가 주식이었으니 떡볶이와 어묵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일 수밖에...
우리 형제는 그 자리에 서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맛있는 떡볶이와 뜨거운 어묵을 베어 먹곤 했다.
물론 엄마도 그 자리에 선 채로 어묵을 몇 개씩 허겁지겁 드시곤 했었는데 입안이 뜨거워서 어깨춤을 출 때에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순간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걱정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사고로 직장을 옮기시면서 수입이 급격히 줄었고, 그로 인해 엄마는 직장을 구하시면서 나는 동생을 잘 봐야겠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살았던 전세방은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샜고, 밤이면 쥐와 바퀴벌레가 나와 잠을 설치곤 했었다.
그렇다 보니 몸서리치는 어둑어둑한 이 전세방을 벗어나는 것은 우리 가족 모두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엄마는 우리도 집을 사서 좋은 곳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우리 가족은 새 보금자리를 구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고, 그 당시 그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나는 자발적으로 고통분담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동생이 엄마를 마중 나가자고 조르던 날이 많아질수록 나는 돈 걱정을 했었던 것 같다.
'먹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그렇게 떡볶이와 어묵을 사 먹는 과소비(?)를 하다간 거지꼴을 면하지 못한다.'
뭐 이런 류의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엄마를 마중 나갔다.
엄마는 포장마차에서 평소보다 적게 먹는 내게
"준아! 더 먹어라 왜 그것만 먹니?"라고 하셨고,
나는 "많이 먹으면 비싸잖아! 그만 먹을래"라고 했다.
분식집 사장님은 엄마에게 "아이고 효자네 효자!”
하시며
"괜찮다. 이거는 서비스~! "하시며
튀김도 주셔서 넙죽 받아먹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길거리에 서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고생한 엄마!
분명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을 것이고,
얼마나 시장했을까?
그렇게 굶주린 상태에서 만나
우리는 지하철역 앞에서 뜨겁게 만났고,
서로의 생사와 사랑을 확인했다.
엄마도 좋았으리라!
퇴근 후 가족이 나를 반겨주고 기다려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는 일인지를 이제는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즐거움이었던 시절,
하루의 끝 마무리는 엄마를 보러
지하철까지 가는 길이었다.
다시 예전의 그 모습들을 상상해보니
그냥 웃음이 난다.
행복하다!
To. 엄마
어제는 사나운 태풍이 불어 비도 많이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네요.
간밤에 혼자 무섭지는 않으셨나요? 늘 멀리 있으니 걱정이 됩니다.
늘 괜찮다! 아무 일 없다고 하시지만, 자식들 걱정할까 봐 늘 괜찮다고 하시는 것 압니다.
때로는 안 괜찮다고 말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조금 더 살필 수 있게 저한테 더 기대셔도 됩니다.
엄마!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기만 하세요! 아셨죠?
From. 아들